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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 커플은 발리 못간다? 역사 논쟁까지 부른 인니 新형법 [세계 한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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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한잔]은 우리 삶과 맞닿은 세계 곳곳의 뉴스를 에스프레소 한잔처럼, 진하게 우려내 한잔에 담는 중앙일보 국제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

‘발리 성교 금지(Bali bonking ban)’

외국인 관광객들이 지난 3월 22일 인도네시아 발리의 쿠타 해변에 앉아 있다. AP=연합뉴스

외국인 관광객들이 지난 3월 22일 인도네시아 발리의 쿠타 해변에 앉아 있다. AP=연합뉴스

인도네시아 국회가 지난 6일(현지시간) 통과시킨 새 형법 '혼외 성관계 금지'엔 이런 별명이 붙었다고 BBC가 13일 전했다. 혼외 성관계를 포함해 혼전 동거 등 사생활 영역에서 과도한 처벌 내용이 담겼기 때문이다. 새 형법에 따르면 혼외 성관계 적발 시 1년 이하의 징역, 혼전 동거는 6개월 이하의 징역형을 받을 수 있다. 나아가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외국인도 대상이 될 수 있다. 다만, 혼외 성관계와 혼전 동거는 친고죄가 적용된다.

새 형법은 대통령과 국가 기관을 모욕하고 사전 허가 없이 시위를 벌이거나 가짜뉴스 확산, 공산주의 등 국가 이념에 반하는 견해를 퍼뜨리는 경우도 처벌하도록 했다. 신성 모독죄도 강화해 민주주의에 역행한다는 지적도 있다. 또 만취한 사람에게 술을 팔거나 술을 주는 사람은 1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음주 관련 조항도 논란이 됐다.

논란이 끊이지 않자 인도네시아 정부는 “법 시행까지 최대 3년이 걸릴 수 있다”며 “시행령이나 시행규칙을 통해 우려 사항을 보완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발리 관광 1위 호주 “여행자 조심”

인도네시아 시민 단체를 중심으로 반대 목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유엔도 인도네시아 정부를 비판하고 나섰다. 지난 8일 성명을 통해 “일부 조항이 인권에 관한 인도네시아의 국제법적 의무를 위반하고 언론의 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인도네시아의 최대 관광지 중 하나인 발리를 찾는 여행객들에겐 예의주시하고 있다. 가디언에 따르면 발리를 가장 많이 찾는 호주는 '인도네시아 여행지침서'에 새 형법과 관련한 내용을 업데이트했다. 호주 정부는 “인도네시아 의회는 혼전 동거와 혼외 성관계에 대한 처벌을 포함하는 형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면서 “향후 3년 이내에 발효가 예상되는데, 여행자들은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올해(1~9월) 발리에 방문한 호주 관광객은 35만명이었다.

기업에서도 새 형법이 인도네시아의 이미지를 손상할 위험이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성 김 주인도네시아 미국 대사는 “개인적인 결정을 범죄화하는 것은 인도네시아에 투자하려는 기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 "내용 보완해 2025년 시행”

야손나 라올리 법무인권부 장관(오른쪽)과 밤방 우리안토 3분과 위원회 의장이 지난 6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의회 본회의에서 새 형법 개정안을 들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야손나 라올리 법무인권부 장관(오른쪽)과 밤방 우리안토 3분과 위원회 의장이 지난 6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의회 본회의에서 새 형법 개정안을 들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인도네시아의 형법 개정 움직임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19년에도 이 같은 안이 국회에서 발의된 후 대학생을 주축으로 대규모 시위가 열렸다. 당시 시위 여성들은 ‘내 가랑이는 정부에 속한 게 아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반발했다. 1998년 민주화 시위 이후 최대 인파가 몰리면서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법안 표결을 연기할 것을 촉구했다.

이번 개정안은 동성애 처벌 등은 빠져 3년 전보단 완화됐다. 싱가포르의 싱크탱크 예수 유소프 이삭 연구소의 아안 수리야나 연구원은 파이낸셜타임스(FT)에 “다른 보수적인 정치인보다 중도적인 위도도 대통령이 새 형법안을 내놓은 것이 더 낫다”면서 “다양한 의견을 수용하려고 노력한 부분이 보인다”고 했다.

혼외 성관계, 외국인 처벌 어려워 

외국인 관광객들이 지난 9월 16일 인도네시아 발리 쿠타 해변에서 갓 부화한 바다거북을 풀어주는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외국인 관광객들이 지난 9월 16일 인도네시아 발리 쿠타 해변에서 갓 부화한 바다거북을 풀어주는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그런데도 '외국인 처벌' 등이 연일 논란이 되자 와얀 코스터 발리 주지사는 지난 12일 성명을 통해 “호텔이나 빌라, 아파트, 게스트하우스 등 관광 숙박시설에서 체크인 시 결혼 여부를 확인하지 않겠다”며 “관광객들의 사생활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했다. 인도네시아 법무인권부 차관도 외국인을 기소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인도네시아 현지 여행업체인 사삭투어의 신동민 소장은 “혼외 성관계의 경우, 고발할 수 있는 사람은 남편·부인 등 배우자와 직계가족만 가능하다”면서 “관광객이라면 적용될 가능성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했다. 이어 “혼전 동거도 애인과 여행 중이라면 신고할 수 있는 사람은 서로의 부모님만 가능해 적용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다만 애인이 인도네시아 사람일 경우엔 처벌받을 가능성이 커진다.

오히려 음주 관련 조항이 관광업계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신 소장은 “식당이나 호텔 등에서 술 취한 외국인이 계속 술을 주문한다면 일하는 현지 직원들만 위법 상황에 빠지게 된다”며 “외국인 역시 다른 관광객에게 술을 권하다가 처벌받을 수 있어 관광업에 타격이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산디아가 우노 인도네시아 관광창조경제부 장관은 이런 지적이 타당하다며 충분한 논의를 거쳐 조율하겠다고 밝혔다.

관광객들이 지난 11월 12일 인도네시아 발리의 짐바란 해변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관광객들이 지난 11월 12일 인도네시아 발리의 짐바란 해변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식민 잔재 청산은 명분, 무슬림 표 의식

정부의 노력에도 새 형법이 민주주의 후퇴로 보인다는 게 중론이다. 논란이 커지자 일부 정치인과 법조인은 새 법안이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 법을 대체하기 때문에 인도네시아의 독립성과 독실함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네덜란드는 1602년부터 1949년까지 약 350여년간 인도네시아를 지배했다. 야손나 라올리 법무인권부 장관은 “이제는 형법 개정에 대한 역사적 결단을 내리고 우리가 물려받은 식민지 형법을 떠나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인도네시아 무슬림 여성들이 지난 11월 8일 자카르타의 모스크에서 기도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인도네시아 무슬림 여성들이 지난 11월 8일 자카르타의 모스크에서 기도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하지만, 새 형법엔 2024년 대선과 총선에서 무슬림 표를 얻기 위한 정치권의 속내가 담겨 있다는 지적도 있다. 새 형법은 정부와 여권, 이슬람 정당 등을 비롯한 야권 전체의 지지를 받아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인도네시아는 국교가 이슬람교는 아니지만, 2억7640만명 인구 가운데 87%가 무슬림이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보수적인 무슬림이 성장하고 있다. 지난 2016년 말 중국계 기독교도인 바수키 차하야 푸르나마 전 자카르타 주지사가 연설에서 이슬람 경전 코란을 인용하자, 이슬람 단체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는 등 온건한 이슬람 국가가 변하고 있다고 호주 ABC방송이 전했다.

FT에 따르면 보수적인 무슬림은 다가오는 선거에서 주요 세력이 될 수 있다. 지난 2019년 대선에서도 위도도 대통령은 이들의 표심을 얻기 위해 부통령직에 강경파 이슬람 성직자인 마루프 아민을 내세웠다. 위도도 대통령은 3선 연임이 허용되지 않아 2014년부터 이어진 10년 임기를 마치고 퇴진한다.

인도네시아 강경파 무슬림들이 지난 11월 4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반정부 시위를 벌이고 있다. EPA=연합뉴스

인도네시아 강경파 무슬림들이 지난 11월 4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반정부 시위를 벌이고 있다. EPA=연합뉴스

다른 대권 주자들은 보수파 무슬림 유권자를 사로잡기 위해 총력을 다하고 있다. 야당인 대인도네시아운동당(그린드라당)은 최대 무슬림 정당인 국민계몽당(PKB)과 2024년 선거에서 연대하기로 했다. 지난 2번의 대선에서 위도도 대통령에게 진 프라보워 수비안토 국방부 장관이 또 대인도네시아운동당 후보로 대권에 도전할 뜻을 보였다. 수비안토 장관은 인도네시아의 민주화 이전인 1968~98년까지 30년간 철권을 휘둘렀던 수하르토 전 대통령의 사위다. 군 장성 출신으로 무슬림 보수세력의 지지를 받고 있다.

대학생 시위 등 MZ세대는 반발 

시민 운동가들이 지난 6일 인도네시아 욕야카르타에서 새 형법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포스터에는 '개정 형법을 거부하라' '개정형법이 언론자유를 족쇄로 묶는다' 등이 적혀 있다. AP=연합뉴스

시민 운동가들이 지난 6일 인도네시아 욕야카르타에서 새 형법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포스터에는 '개정 형법을 거부하라' '개정형법이 언론자유를 족쇄로 묶는다' 등이 적혀 있다. AP=연합뉴스

새 형법이 선거에서 득이 될지는 미지수다. 20~30대 젊은 층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어서다. 인도네시아 MZ세대(1981~2012년 출생)는 전체 인구 중 50%가 넘는다. 일부 지역에선 대학생들의 시위가 시작됐고, 헌법재판소에 이의를 제기할 움직임도 보인다.

서명교 한국외국어대 말레이·인도네시아어과 교수는 “인도네시아는 종교의 정치화를 반대하는 가장 온건한 무슬림 다수 국가”라며 “국민의 반발이 심해 새 형법의 내용이 많이 바뀐다면 이런 기조가 지켜질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논란이 되는 내용이 그대로 적용된다면 “인도네시아도 이슬람 보수화 흐름을 따르게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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