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기후변화 책임 겨우 3%인데...아프리카 '최악의 가뭄' 직격탄 [이젠 K-ODA시대]

중앙일보

입력

"최악의 가뭄으로 동물이 죽어갑니다. 식량 부족으로 학생들이 걸을 힘도 없어 학교에 못 가요."
(레이첼 루토 케냐 영부인, 지난달 23일 용산 대통령실 환담 중)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23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정상 회담을 마친 윌리엄 루토 케냐 대통령을 배웅하고 있다. 대통령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23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정상 회담을 마친 윌리엄 루토 케냐 대통령을 배웅하고 있다. 대통령실.

케냐 국가원수로 32년 만에 한국을 찾은 윌리엄 루토ㆍ레이첼 루토 케냐 대통령 부부에게 '가뭄'은 해외에서도 입에 달고 다니는 주제였다. 케냐 국가가뭄관리청(NDMA)은 지난 9월 보고서에서 "전국 47개 주(州) 중 20개가 '가뭄 경보' 상태며, 7개 주에선 일가족이 사흘을 내리 굶는 경우도 속출한다"고 밝혔다. 이어 "생후 6개월 이상 4세 이하 어린이 최소 88만 명이 심각한 영양실조 상태"라고 지적했다.

전례 없는 가뭄 와중에 지난 9월 취임한 루토 대통령을 만난 윤석열 대통령은 "케냐의 가뭄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도록 협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실제로 최근 국제사회에선 한국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이 아프리카의 기후 위기 해결에 실질적인 기여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아프리카의 뿔'(The Horn of Africaㆍ아프리카 북동부에서 인도양으로 돌출된 지역)에 해당하는 케냐·에티오피아·소말리아 등은 40년 만에 닥친 최악의 가뭄으로 고통받고 있다. 4년 연속으로 우기를 건너뛰었다. 지난달 유엔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 굶주리는 인원은 8200만명에 달한다. 지난해 같은 기간 5100만명과 비교해 1년 만에 약 60%가 증가했다.

땅이 갈라지고 가축들이 굶어 죽으면서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하던 주민들은 생계를 잃었다. 가끔 비가 오더라도 가뭄을 해소하는 '착한 비'가 아닌 불규칙한 폭우나 먹을 수 없는 소금물의 범람 등 이상 기후만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 지난 2월부터 10개월째 이어지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아프리카의 식량난을 더욱 가중시켰다. 소말리아의 경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산 밀 의존도가 92%에 달하는데, 전쟁 이후 사실상 수입이 모두 끊겼다. 라니아 다가시 유엔아동기금(UNICEF) 동남아프리카 지역 부국장은 이미 지난 6월 보도자료를 통해 "전 세계가 우크라이나 전쟁이 아프리카에 미치는 여파를 즉시 살피지 않으면 '아프리카의 뿔' 지역 아동 사망률은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지난 6일(현지시간) 케냐 투르카나주의 로통와 마을에서 주민들이 지하 20m에서 물을 길어 오르고 있다. 지하수 관정 시스템이 없는 이곳 주민들은 땅을 파서 물을 얻고 있다. 마을 남성들은 가축들의 먹이를 찾아 먼 곳을 나가기 때문에 땅을 파서 물을 기르는 일은 여성들의 몫이다. 지하 20m에서 양동이를 통해 물을 올리기 위해서는 최소 12명의 여성이 필요하다. [외교부 공동취재단(케냐 투르카나주)]

지난 6일(현지시간) 케냐 투르카나주의 로통와 마을에서 주민들이 지하 20m에서 물을 길어 오르고 있다. 지하수 관정 시스템이 없는 이곳 주민들은 땅을 파서 물을 얻고 있다. 마을 남성들은 가축들의 먹이를 찾아 먼 곳을 나가기 때문에 땅을 파서 물을 기르는 일은 여성들의 몫이다. 지하 20m에서 양동이를 통해 물을 올리기 위해서는 최소 12명의 여성이 필요하다. [외교부 공동취재단(케냐 투르카나주)]

가뭄과 전쟁이 먹을 것과 일자리를 모두 앗아가자 주민들은 살던 집을 버리고 떠돌기 시작했다. 세계식량계획(WFP)은 이번 가뭄으로 인한 아프리카 대룍의 실향민(IDP)을 100만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했다. 마이클 던포드 WFP 아프리카 지역국장은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유엔 뉴스에 "'아프리카의 뿔' 지역 사람들은 글로벌 기후 위기에 어떤 책임도 없다"며 "농ㆍ목축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온실 가스를 배출한 적도 없는데, 기후 위기의 최전선에 서서 가뭄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고 말했다.

유엔 등 집계에 따르면 산업화 이후 아프리카가 뿜어낸 탄소는 전 세계 배출량의 3% 수준이다. 약 30%에 달하는 유럽, 그 뒤를 잇는 아시아(28%), 북미 지역(27%)에 비하면 10분의 1 수준이다. 지난달 AP통신은 "미국 와이오밍 주 인구의 95배에 달하는 5500만명이 살고 있는 케냐보다 와이오밍 주 하나가 3.7배 더 많은 이산화탄소를 내뿜는다"고 지적했다. 아프리카 개도국을 중심으로 "탄소 배출의 책임은 미미한데, 가뭄·홍수·폭염 등 기후 변화의 피해는 가장 크게 입고 있다"는 목소리가 갈수록 거세지는 이유다.

지난달 이집트에서 열렸던 제27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7)를 뜨겁게 달군 주제는 '손실과 피해' 기금 조성이었다. 기후 변화로 막대한 타격을 입은 개발도상국의 '손실(loss)'과 '피해(damage)'를 국제사회가 함께 보상해줘야 한다는 취지다. 우여곡절 끝에 총회 마지막 날 기금 조성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지만 누가 어떻게 어느 범위까지 지원할지는 여전히 안갯속이다. 선진국의 반대로 기금이 법적 책임이나 배상의 성격은 띄지 않도록 한 것도 개도국 입장에선 아쉬운 부분이다.

지난달 20일(현지시간) 이집트 샤름 엘 셰이크에서 열린 27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회의(COP27) 정상회의에서 COP27 의장인 사메 슈크리 이집트 외무장관이 다른 참석자들과 대화하는 모습. AP Photo/Peter Dejong. 연합뉴스.

지난달 20일(현지시간) 이집트 샤름 엘 셰이크에서 열린 27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회의(COP27) 정상회의에서 COP27 의장인 사메 슈크리 이집트 외무장관이 다른 참석자들과 대화하는 모습. AP Photo/Peter Dejong. 연합뉴스.

한국은 우선 개도국의 손실과 피해를 부담해야 하는 '선진국' 그룹에선 빠졌다. 92년 유엔 기후변화협약 채택 당시 선진국으로 분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한국 또한 갈수록 아프리카를 비롯한 남미, 동남아 등 개도국 기후 위기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란 전망이 나온다. 아프리카의 기후 위기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수준에 다다른 만큼 한국의 강점인 '그린 ODA(공적개발원조)'등을 통해 현지 주민의 기후 위기 대응 '회복력(resilience)'을 높이는 데에 보다 적극적으로 기여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기후 대응 협력을 고리로 여전히 한국 외교의 '블루 오션'으로 평가받는 아프리카에 외교 지평을 넓힐 수도 있다.

유연철 전 외교부 기후변화대사는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한국의 ODA 지원으로 아프리카 개도국의 기후 대응 능력이 강화되고 관련 기술력이 높아지면 이후 한국 기업 추가 진출 및 투자의 발판이 마련될 수 있다"며 "성공적인 ODA 자산은 향후 우리 외교 지평을 넓히는 데 있어 긍정적 효과로 분명 돌아오며, 수원국과 공여국 간 지속 가능한 '윈-윈 관계'를 만들기 위해선 기술ㆍ자금 측면의 지원 뿐 아니라 환경ㆍ사회ㆍ반부패 분야 등에 대한 구조적 개선 노력도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