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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 선생 아들이 출연한 영화…록 허드슨 주연의 6·25 [Focus 인사이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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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리우드를 대표하는 스타 중 하나였던 록 허드슨을 비롯해 말론 브란도의 첫 번째 아내이기도 했던 안나 카쉬피, 안창호 선생의 첫째 아들인 필립 안 등이 출연한 영화가 있다. 1957년 미국 유니버설 영화사에서 제작한 ‘전송가(Battle Hymn)’다. 딘 헤스 미 공군 대령의 동명 자서전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배경이 6ㆍ25 전쟁인 전쟁 영화지만, 전투를 묘사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을 미소 짓게 하는 따뜻한 이야기다.

1957년 영화 '전송가'의 포스터. 등장한 어린이들을 고려한다면 헐리우드 영화 중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출연한 작품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 하다. 위키피디아

1957년 영화 '전송가'의 포스터. 등장한 어린이들을 고려한다면 헐리우드 영화 중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출연한 작품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 하다. 위키피디아

우리나라의 국력이 신장하고 한류가 인기를 얻으며 이제는 덜 한 편이나 종종 지금도 외국영화나 보도 자료에서 우리나라의 이미지가 잘못 묘사되는 경우가 있다. 영화 제작 당시에는 더더욱 한국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다 보니 태국식 불상이 소품으로 나오는 것처럼 고증이 허술한 편이다. 또한 실화에 바탕을 뒀어도 극적 효과를 내려고 각색한 부분이 많다.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허드슨이 분한 헤스는 한국 공군 전투기 조종사를 양성하기 위해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에 창설된 제6146부대의 초대부대장이었다. 또한 직접 전투기를 몰고 200여 차례나 출격했던 역전의 용사였다. 이런 전과로 그는 미국 공로훈장뿐 아니라 대한민국 무공훈장도 받았다. 특히 그가 조종한 F-51 머스탱 제18번기의 동체에 써넣은 ‘信念의 鳥人’은 현재도 한국 공군의 모토가 되고 있을 정도다.

딘 헤스는 한국 공군의 대부와 같은 인물이다. 그가 조종한 F-51기의 동체에 새겨 넣은 '신념의 조인'은 한국 공군의 모토와 다름없다. 공군

딘 헤스는 한국 공군의 대부와 같은 인물이다. 그가 조종한 F-51기의 동체에 새겨 넣은 '신념의 조인'은 한국 공군의 모토와 다름없다. 공군

우리나라 최초의 전투기 조종사들이 그의 지도를 받았고, 이들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계속해서 조종사가 양성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헤스는 한마디로 한국 공군의 아버지라 불릴 만한 인물이다. 그런 그의 자서전에 1000명 가까운 전쟁고아를 피난시킨 극적인 작전이 소개돼 있다. 비록 자신의 업적처럼 미화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그 또한 딸을 입양해서 키웠을 만큼 전쟁고아 지원에 적극적이었다.

유모차 공수작전

훗날 휘경학원의 초대 이사장이 되는 황온순 원불교 종사는 한남동에 설립한 보화원에서 전쟁고아들을 돌보고 있었다. 서울이 수복된 후 알게 된 미 제5공군사령부 군목 러셀 브레이즈델 중령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다. 그러던 중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반전되고 50년 12월 서울 소개(疏開ㆍ주민이나 시설의 대피)가 결정되자 황온순과 브레이즈델은 고아들을 선편으로 피난시키려고 인천으로 이동했다.

영화 '전송가' 촬영을 위해 미국에 도착한 어린이들과 함께한(왼쪽부터) 황온순, 브레이즈델, 헤스. 공군

영화 '전송가' 촬영을 위해 미국에 도착한 어린이들과 함께한(왼쪽부터) 황온순, 브레이즈델, 헤스. 공군

그러나 선박 수배가 되지 않아 일부 어린이만 겨우 배를 탈 수 있었다. 나머지 907명의 고아가 적진에 고립될 위기에 빠졌다. 전쟁 후 북한 치하의 서울에서 혹독한 시간을 보냈기에 황온순을 비롯한 관리자들의 두려움은 대단했다. 급박한 후퇴 와중이어서 이들을 구원하기는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이때 브레이즈델로부터 애타는 소식을 접한 미 제5공군 작전참모 터너 로저스 대령의 도움으로 16대의 C-54 수송기를 지원받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수송기 확보가 결정된 다음 날 오전 8시까지 고아들이 김포공항에 도착하지 않으면 수송기는 작전 투입을 위해 즉시 철수할 것이라는 조건이 내걸렸을 만큼 빠듯한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인천에서 김포공항까지 갈 수 있는 차량 확보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아이들을 데리고 걸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 절망적일 때 브레이즈델은 우연히 인천항에서 하역 작업을 하던 14대의 미 해병대 트럭을 발견했다.

그는 상부의 명령이라는 거짓말로 작업을 중지시키고 시간에 맞춰 아이들을 김포공항까지 옮기는 데 성공했다. 이 때문에 비록 처벌되지는 않았지만 브레이즈델은 군법에 회부되기도 했다. 덕분에 중공군의 서울 입성 직전인 1950년 12월 20일, 모든 고아가 제주도로 탈출할 수 있었고. 그해 크리스마스를 안전하고 따듯하게 보낼 수 있었다. 미군 전사에는 이를‘유모차 공수작전’으로 기록하고 있다.

흥남에서 철수하는 선박에 승선한 피난민들. 당시에는 일시적인 피난으로 생각했으나, 흥남철수는 우리 민족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가장 짧은 시간에 삶의 터전을 바꾼 사건이었다. 위키피디아

흥남에서 철수하는 선박에 승선한 피난민들. 당시에는 일시적인 피난으로 생각했으나, 흥남철수는 우리 민족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가장 짧은 시간에 삶의 터전을 바꾼 사건이었다. 위키피디아

전쟁 중에, 그것도 급박한 상황에서 인도주의적 작전이나 행위를 벌이기는 생각만큼 쉽지 않다. 전투가 우선시되므로 어쩔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유모차 공수작전과 탄막으로 중공군의 남진을 막고 미 10군단을 해상으로 철군시키는 와중에 무려 10만의 민간인을 함께 피난시킨 흥남철수 작전이 있었던 한반도의 50년 12월은 세계 전쟁사에서 보기 드문 인도주의가 빛을 발했던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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