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 구본창이 '쓰다 만' 비누조각 수백 개를 모은 이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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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8호 19면

‘비누’ 에 꽂힌 사진작가 구본창

갤러리 류가헌‘비누’전시장에서 명상에 잠겨 있는 구본창. 박종근 기자

갤러리 류가헌‘비누’전시장에서 명상에 잠겨 있는 구본창. 박종근 기자

‘사라져 가거나 점점 희미해지는 것들은 언제나 내 시선을 붙들었다. 끊임없이 소멸하는 비누 또한 이렇게 내 사진의 대상이 되었다. 비누를 결코 하찮은 것이라 밀어 놓을 수 없었던 이 끌림의 시작은, 몸집을 잃어가는 모든 존재에 조각된 시간의 흔적 때문이 아니었을까.’

사진가 구본창이 직접 쓴 사진집 『비누』의 서문이다. 담백하면서도 기품 있는 조선 달항아리의 미학을 우리에게 알려준 구 작가가 12월 6일부터 내년 1월 1일까지 서울 청운동에 있는 갤러리 류가헌에서 ‘비누’ 사진전을 연다. 백자·탈·곱돌·황금 등 여러 오브제와 더불어 소개한 적은 있어도 비누만 모은 전시는 국내 처음이다.

‘백자’ 이어 ‘황금’ 시리즈 준비

지난 14일 구 작가를 만나기 위해 방문한 갤러리에서 가까이 본 비누 사진은 감각적이면서도 미니멀한 느낌이 딱 그의 작품다웠다. 구 작가는 2004년을 전후로 백자와 비누, 두 가지 주제의 시리즈 작업을 동시에 시작했다고 한다. 고귀한 유물 ‘백자’와 흔해 빠진 일상용품 ‘비누’. 이 간극 사이에서 그의 눈을 사로잡은 공통점은 무엇이었을까.

“한창 백자를 찍을 때였는데 백자 표면에 있는 갈라짐·긁힘 같은 ‘시간의 흔적’이 바싹 말라 버린 비누 표면에도 똑같이 있더라고요. 평소에도 스크래치(상처)가 난 것, 세월의 흔적이 담긴 것, 직접적으로 어필하지 않고 숨어 있거나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마음이 먼저 갔어요.”

그가 본격적으로 비누를 모으게 된 건 시리즈를 시작한 때보다 훨씬 이전인 1998~99년부터다. 센트럴 세인트 마틴 예술학교 교환교수로 런던에 머물 때, 영국에선 다양한 색깔의 비누가 유행했고 그 형형색색의 컬러와 향기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소환했다. “우리 집 욕실에 ‘미향(애경유지에서 1956년 생산한 국내 최초의 미용비누)’이라는 비누가 있던 기억이 나요. 당시에는 비누가 귀했잖아요. 종이곽에 장미꽃 같은 게 그려져 있었는데 좋은 향기까지 나서 조심스럽게 살살 다뤘던 기억이 있죠.”

구 작가에게 비누는 ‘시간의 흔적’이자 ‘손의 기억’이다. 오랫동안 천천히 어루만지는 누군가의 손길에 따라 비누는 제각기 처음과는 다른 형상이 되고, 물기가 마른 후에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빛깔과 결을 드러낸다.

“그 모습이 참 애틋하더라고요. 수많은 여행을 하면서 호텔을 떠날 때면 내 손에 닳아서 작아진 비누를 차마 버릴 수 없어 하나둘 집으로 가져왔죠. 그렇게 몇 주씩 여행하다 돌아오면 우리 집 욕실 비누는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더라고요. 그렇게 표정이 다른 비누들을 계속 모으게 됐어요.”

그렇게 ‘쓰다 만’ 비누를 모은 게 200개가 넘는다. 명품도, 보석도 아닌 비누 때문에 점잖은 구 작가는 쑥스러운 일도 꽤 저질렀단다. “카페에서 훔쳐오기도 했어요.(웃음) 어느 카페 화장실에서 거의 닳아 곧 버려질 것 같은 비누를 보니 너무 아까워 슬쩍 주머니에 넣게 되더라고요. 사진가 강운구 선생 댁에 갔다가 유달리 결이 많은 비누를 보고 뺏어온 적도 있죠.(웃음) 색이 다른 비누가 겹쳐진 것은 그 모습이 너무 짠하고 재밌어서 얻어 오고.”

비누 한 장이 귀했던 시절, 양손 사이에 넣고 비벼도 거품이 안 일 만큼 작아진 비누조각들을 겹쳐 쓰거나 구멍난 스타킹에 담아 쓰곤 했다. 물만 닿아도 쉽게 물러지는 비누 때문에 “아직도 그대로네”라는 광고 카피를 단 ‘비놀리아’ 비누가 환영받던 때도 있었다.

1980년대 민주화·산업화의 격동기 시절, 한국의 풍경과 컬러를 기록한 사진집 『KOREA ; In the 1980’s』. 박종근 기자

1980년대 민주화·산업화의 격동기 시절, 한국의 풍경과 컬러를 기록한 사진집 『KOREA ; In the 1980’s』. 박종근 기자

“우리가 잘 느끼지 못하지만 비누는 거품을 내어 우리의 더러움을 씻어 주고, 그만큼 제 몸은 닳죠. 누군가의 시간이 축적될수록 작아지고 상처만 남는 모습이 자신의 역할에 가장 충실했던 존재의 흔적 같아서 자꾸만 눈길이 갑니다. 주목받지 못한 것들이 나를 통해 누군가에게 다시 한 번 감동을 주거나 조금이라도 부각된다면 보람이죠. 어떤 브랜드의 비누였는지, 누구에게서 얻어온 것인지 기록하지 못한 게 아쉬워요.” 구 작가 덕분에 ‘쓰다 만’ 작은 비누 조각들은 그렇게 갤러리에서 ‘일상의 보석’처럼 빛났다.

그는 최근 사진집 『KOREA ; In the 1980’s』도 출간했다. 제목 그대로 1980년대 한국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만 묶은 책이다. 노랑 저고리에 꽃분홍 치마를 입은 한복사진 표지부터 손으로 그린 극장 간판사진까지, 책 속 모든 풍경의 컬러는 유치하고 촌스럽기 짝이 없다. 백자·비누·황금 시리즈 사진들의 섬세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떠올리면 이게 과연 사진가 구본창의 사진이 맞나 싶다.

“‘대체 구본창은 어떤 사진을 찍는 사람이야?’ 하겠죠.(웃음) 88서울올림픽을 앞둔 서울과 지방도시는 서둘러 외관을 치장했지만 골목에 접어들면 세월의 손때가 묻은 삶이 그대로 있었죠.”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 후 독일 함부르크 조형미술대학에서 사진 디자인을 전공하고 85년 귀국한 구 작가에게 격동의 전환기를 맞고 있는 80년대 한국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세계였다.

80년대 한국 일상 담은 사진집도 내

“울창한 숲이 많은 함부르크와 경제 개발이 급선무였던 서울은 공기부터 달랐어요. 6년간의 유럽생활이 없었다면 거북하지 않았을 그 답답함이 불과 몇 달 만에 익숙해지자, 그 재빠른 적응이 두려웠죠. 잊고 있던 한국 고유의 아름다운 색과 형태도 있었지만 도시의 대부분은 지나치게 시선을 자극했어요. 현대와 근대가 상충하는 모순이랄까. 이걸 다큐멘터리로 찍어야겠다는 욕구와 생존의 절박함으로 곳곳을 쏘다녔죠.”

한국에 막 돌아온 후 적응을 못 해 느꼈던 외로움은 흑백사진 시리즈 ‘긴 오후의 미행’으로 이미 발표한 바 있다. 이번에는 변화를 위해 탈바꿈하던 80년대 한국의 키치한 컬러를 기록한다는 의미에서 사진집을 엮은 것이다.

“이런 도시 사진을 찍던 나와 백자·비누 사진을 찍던 나 사이에는 20년의 갭이 있어요. 강산이 두 번 바뀔 시간이죠. 한국에 막 돌아왔을 때는 도시와의 충돌에서 내가 무엇을 기록할까, 어떻게 찍어야 할까, 이런 현실적인 고민이 많았다면 20년 후에는 우리 문화를 생각하게 되고 나 자신도 좀 더 관조적으로 삶의 태도가 바뀐 거죠.”

그는 얼마 전 시간의 흐름을 또 한 번 경험했다. 지난 9월 서울고·연세대 동문이었던 배창호 영화감독의 데뷔 40주년 기념 특별전에서 28년 전 자신이 찍었던 영화포스터 ‘젊은 남자’(1994)를 마주하면서다.

“당시 배 감독은 이정재씨를 제임스 딘처럼 찍어 달라고 했는데, 영화 속 분위기는 달랐어요. 그래서 이정재씨 얼굴을 클로즈업한 사진과 상체를 드러낸 사진으로 포스터를 만들었죠. 당시 비디오방에선 이 포스터가 남아나질 않았다고 해요.(웃음) 언제고 ‘취화선(최민식)’ ‘태백산맥(안성기)’ ‘젊은 남자(이정재)’ ‘시(윤정희)’ ‘우리 기쁜 젊은 날(황신혜)’ 등의 영화 포스터를 작업하면서 만났던 스타들의 사진만 전시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비누부터 스타까지. 사진가 구본창의 스펙트럼은 끝이 없다. 다만, 우리 모두의 역사, 즉 시간의 결을 쫓는다는 주제는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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