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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파일] ‘전세 영끌족’의 비애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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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8호 31면

배현정 경제산업부문 기자

배현정 경제산업부문 기자

“집도 없는데 전세대출 이자로 얼마를 내는지 모르겠어. 진짜 전세 최고가에 계약했는데, 금리까지 급등하고. 지금 전세가는 2억원이나 떨어져서 제대로 보증금 돌려받을지도 걱정이고, 진짜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투자)족보다 더 불쌍하다. 영끌족은 집이라도 있지.”

최근 부동산 커뮤니티나 대출 기사 관련 댓글에선 전세 세입자들의 한숨 섞인 글들이 쏟아지고 있다. 부동산시장의 한파가 닥치면서 매매·전세 가격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지만, 집 없는 세입자들도 마냥 기뻐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얘기다.

올해 초만 해도 임대차3법 시행 2년을 맞는 8월이 전세대란의 분수령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득세했다. 수요가 몰리는 서울 아파트 입주물량이 10년 만에 역대 최저치인 데다, 계약갱신청구권 사용이 만료된 매물의 전셋값 상승이 예상됐기 때문이다. 이 같은 우려에 전세 계약을 앞둔 이들은 서둘러 고가라도 전셋집 찾기에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걱정했던 전세대란은커녕 역전세나 깡통전세 얘기가 올 하반기 시장을 도배하고 있다. 역대급 금리 인상이 시장의 판도를 뒤흔들었다.

금리 폭등 후유증으로 수도권 전세 매물이 16일 기준(부동산 빅데이터업체 아실 집계) 전월 대비 1만건 가까이 증가했다. [뉴시스]

금리 폭등 후유증으로 수도권 전세 매물이 16일 기준(부동산 빅데이터업체 아실 집계) 전월 대비 1만건 가까이 증가했다. [뉴시스]

문제는 이러한 예측불허의 시장에서 이자 폭탄에 고스란히 노출된 ‘전세 영끌족’의 고통은 외면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3억원의 전세대출을 빌려 신축 아파트를 계약했던 A씨는 “얼마 전 금리변동 주기 6개월을 맞아 전세대출 월평균 상환금이 약 92만원에서 150만원으로 급격하게 뛰었다”며 날벼락 같다고 호소했다. 더 무서운 것은 금리 인상은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이다. 16일부터 대출금리의 기준이 되는 코픽스(COFIX·자금조달비용지수) 금리는 상향돼 새롭게 적용된다. 전월 대비 0.36%포인트 상승하며 사상 최초 4%대에 진입했다. 이에 따라 연말 전세대출 금리의 상단은 7.6% 수준에 이를 전망이다.

그런데 정부의 이자 부담 경감 정책은 집 있는 영끌족을 향해 있다. 정부는 제1·2금융권에서 받은 변동·혼합형 금리의 주택담보대출을 3%대의 고정금리로 바꿔 주는 안심전환대출을 시행 중이다. 새해에는 소득과 상관없이 집값이 9억원을 넘지 않으면 소득 제한 없이 연 4%대 금리로 바꿔 주는 특례 보금자리론을 출시할 예정이다. 전세 세입자를 위해서도 안심전환대출과 같은 부담 완화 제도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지만, 현재 이렇다 할 대책이 나오지 않은 상태다. 금리 상승기, 서민들의 이자 부담을 낮춰 주는 정책에서 집주인이 아닌 전세 세입자는 소외돼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권의 움직임도 미온적이다. 은행권 변동금리형 전세자금 대출 잔액은 지난해 말 기준 151조5000억원으로, 전체 162조원의 93.5%를 차지했다. 전세 대출자 94%가량이 금리 상승에 따른 이자폭탄에 노출돼 있는 셈이다. 그런데도 금리 인상기를 맞아 대출 금리 인상에 발 빠르게 대처했던 은행권은 이달 들어서야 일부 은행에서 전세대출 금리 인하에 나서기 시작했다. 당국의 대출 금리 주시 발언이 나온 이후다. 이달 우리은행이 신규코픽스(6개월 변동) 전세대출에 한해 금리를 최대 0.85%포인트 내렸고, 농협은행은 내년 1월부터 고정금리 전세대출 금리를 최대 1.1%포인트 내리기로 했다. 대출 금리의 부담은 자금 조달이 어려운 서민일수록 고통이 가중되는 법이다. 지난해 전셋값이 뛸 당시 은행들은 전세대출의 우대금리를 낮추며 대출 조이기에 나서 전세 난민들을 두 번 울렸다. 추후 은행들이 전세대출 금리 인하에 얼마나 동참할지는 아직 안갯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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