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기를 포기하자 색이 튀어 나왔다. 화가 하태임의 컬러밴드가 갖는 의미 [더 하이엔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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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형색색의 컬러밴드가 어디론가 달려간다. 아니, 튀어 올라 부양한다. 응축된 에너지가 폭발한다. 작가 하태임의 그림 ‘컬러밴드’ 시리즈를 보면 드는 느낌이다. 그의 작품은 지금 국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회화 작품으로 꼽힌다. 그의 그림은 강렬한 색채를 활처럼 휜 여러 개의 밴드(띠)로 표현하는 새로운 감각의 추상화다. 과연 하태임의 컬러 밴드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또 그가 컬러 밴드에 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경기도 양평에 있는 하태임 작가의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

더 하이엔드가 만난 아티스트 ㅣ 하태임

양평 작업실에서 만난 하태임 작가. 사진 장현우(스튜디오 프래크)

양평 작업실에서 만난 하태임 작가. 사진 장현우(스튜디오 프래크)

세상과의 소통 도구를 찾다
-컬러 밴드, 어떻게 세상에 태어났나요.
“사실 처음에 그렸던 건 글자가 있는 작업이었어요. 세상을 받아들이는 게 언어잖아요. 저는 언어가 가장 큰 소통의 도구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그 너머에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게 언제였나요.
“2002년쯤 됐을 거예요. 그때부터 문자를 지우기 시작했어요. 베리타스(VERITAS), 러브(LOVE) 같은 글자를 쓰고 지우는 작업을 했어요. 진정한 소통은 언어나 문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하고 찾아 헤매던 시기였어요. 액션 페인팅으로 물감을 던지기도 했죠. 그러다가 점점 시간이 지나면 색채에 매료되기 시작했죠. 2004년 이후엔 제 그림에서 글자가 다 빠져요.”

-색을 화려하게 사용하는 작가는 많지만, 컬러밴드는 독특한 형태와 색감이 가진 개성이 독보적입니다.
“색채는 과연 인간에게 어떤 역할을 할까. 그리고 나한테는 어떤 역할을 할까에 집중하다 보니, 점점 고요해지면서 거칠었던 액션과 붓질이 정제되기 시작했어요. 지우는 행위가 결국 그리기로 치환이 되면서 밴드가 생긴 거예요. 색이 주는 형이상학적인 부분,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느낌들, 총체적인 것들의 합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어요.
저는 ‘그리기를 포기했다’고 표현해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그림을 그린다고 하는 것은 형상을 그리는 건데, 그런 의도를 없앤 거예요. 가장 무(無)의 상태로 그림을 그렸을 때 이렇게 휘어진 패턴이 나오거든요. 그냥 색이 지나간 자리에 색이 남는 것이거든요. 그런 궤적들이 계속 쌓여서 약간은 휘어진 띠로 남는 거예요.”

하태임 작가 작품. Un Passage No.211016, 200x200cm, Acrylic on Canvas, 2021

하태임 작가 작품. Un Passage No.211016, 200x200cm, Acrylic on Canvas, 2021

하태임 작가 작품. Un Passage No.211004, 162x227cm, Acrylic on Canvas, 2021

하태임 작가 작품. Un Passage No.211004, 162x227cm, Acrylic on Canvas, 2021

하태임 작가 작품. Un Passage No.221020, 162x130cm, Acrylic on Canvas, 2022. 사진 하태임

하태임 작가 작품. Un Passage No.221020, 162x130cm, Acrylic on Canvas, 2022. 사진 하태임

하태임 작가 작품. Un Passage No.221024, 180x180cm, Acrylic on Canvas, 2022. 사진 하태임

하태임 작가 작품. Un Passage No.221024, 180x180cm, Acrylic on Canvas, 2022. 사진 하태임

시간과 궤적의 중첩이 만들어낸 자유, 컬러밴드 
-밴드를 모두 붓으로 그리는 건가요. 너무 깔끔해서 다른 도구를 사용하는 건 아닐까도 생각했어요.
“네, 맞아요. 하나의 밴드를 그리기 위해 적게는 4~5번, 많게는 12번까지 계속 색을 겹쳐 칠해요. 내 팔이 그려내는 궤적이 바로 띠가 되는 거죠.”

-밴드가 가지는 독보적인 색감에 관해서도 이야기 안 할 수 없어요. 어디서 영감을 얻나요.
“작업 순간의 감정과 느낌으로 색 조합을 만들어 내곤 했는데, 한 10년 이상 작을 하게 되니 나만의 조율 합이 생긴 것 같아요. 이젠 색 위에 어떤 색을 올리는 게 좋다는 계획이 나오게 됐죠.”

-젊은 시절 프랑스 ‘에콜 데 보자르’를 졸업하고 ‘모나코 왕국상’도 받은 엘리트 아티스트였어요. 그때는 어떤 그림을 그렸나요.
“독일 표현주의적인 작업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트렌스 아방가르드 같은 작업물요. 내 나이 17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거든요. 그때는 ‘죽음’이라는 개념이 늘 머릿속에 있었어요. 작업에서도 그 생각이 드러났고요. 그런데 이 시간이 지나면서 ‘나’에게 더 집중하게 됐죠.”
*하태임의 아버지는 한국 1세대 추상화 거장 하인두(1930~89) 화백이다. 1954년 서울대 미대 서양학과를 졸업하고 박서보, 김창렬 등과 함께 현대미술가협회를 창립해 한국의 앵포르멜 운동을 주도했던 한국 미술사의 역사를 써낸 인물이다.

-작품에 걸리는 시간이 궁금해요.
“그때그때 컨디션에 따라 달라요. 보통 1~2달 정도 걸리는데, 한 번에 여러 개의 작품을 동시에 작업하는 편이에요. 그래도 작업마다 편차가 있어서 어떤 것은 일찍 일어나고 어떤 것은 늦게 일어나요.”

-‘일어난다’라는 게 무슨 뜻인가요.
“다른 작가들은 보통 캔버스를 세워 놓고 작업하는데, 저는 바닥에 눕혀놓고 해요. 일어난다는 것은 그림이 완성돼서 캔버스를 세운다는 의미이고요. 한번은 캔버스를 세워 놓은 채로 작업해본 적이 있어요. 물감이 밴드 아래로 흘러내렸죠. 예전 같으면 그런 모습이 티로 보여 보기 싫었는데 그날은 그게 내 마음의 상태를 그대로 표현하는 것 같아서 오히려 진정성 있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그렇게 완성했죠.”

-또 다른 컬러밴드 스타일이 나온 것이군요.
"맞아요. 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컬러밴드를 정규 작업으로 진행하진 않아요. 특별 에디션 같은 개념이랄까요."

하태임 작가의 여러 표정을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 장현우(스튜디오 프래크)

하태임 작가의 여러 표정을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 장현우(스튜디오 프래크)

다른 작업과 달리 캔버스를 세워 진행한 작품. 물감이 흘러 컬러밴드가 눈물을 흘리는 듯하다. Un Passage No.173001, 200x200cm, Acrylic on Canvas, 2017. 사진 하태임

다른 작업과 달리 캔버스를 세워 진행한 작품. 물감이 흘러 컬러밴드가 눈물을 흘리는 듯하다. Un Passage No.173001, 200x200cm, Acrylic on Canvas, 2017. 사진 하태임

-다작하고 계신다는 느낌이 들어요.
“저는 작업을 더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전시가 잡혀도 내놓을 수 있는 그림이 30점도 안 돼요. 해외에서 전시하자는 요청이 많이 오는데, 작품이 없어서 아트페어도 나가질 못해요.”

-그만큼 인기가 높다는 뜻 아닌가요.
“많이 해야 해요. 피카소가 유명해진 게 작품이 많기 때문이에요. 그 사람의 천재성과 시대적 배경도 물론 있지만, 작품 수가 일단 많아야 하죠. 저는 아직 부족해요. 그래서 작업을 더 열심히 하려고 해요.”

-이제 막 예술에 관심을 갖는 사람의 경우 추상화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요. 처음부터 추상을 하셨던 것은 아니라고 알고 있어요. 지금의 화풍이 나오게 된 계가기 있었나요.
“추상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나만의 것’을 그리려 할 때 나와요. 그 작가가 추상으로 전환한 이유에는 변화의 계기가 되는 필연적인 생각이 있어야 해요. ‘어디서 본 것 같다’라는 생각을 지워야 하는 거거든요.”

-어디서 본 듯한 모든 것의 틀을 깨버리는 거군요.
“내 그림에서 다른 사람의 냄새가 나는 것을 덜어내야 한다. 그러니까 내가 남과 다른 무언가를 찾아내는 과정이죠. 그래야지만 인상에 남는 것 같아요.”

-지금 가장 집중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변화요. 저는 변화가 필요한 것 같아요. 나의 그림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제 한국 스승이신 김태우 교수님이 지금 살아 계셨다면 어떤 작업을 하셨을까. 60세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긴 그 미완의 작품들은 어떤 작품이 되었을까-라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나의 앞길, 앞으로의 방향성을 찾아가려 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변화는 다른 데서 찾진 못하는 것 같아요. 그림을 그리면서 나 스스로 찾아가는 거죠. 나의 마지막 그림은 어떤 그림이 될까 그런 상상을 해요.”

더 하이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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