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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파운드리, 이재용 작품"…'양향자 상사' 그가 푼 뒷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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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임형규 전 삼성전자 사장이 서울 강남구 대치동 사무실에서 반도체 인재 육성 방안을 얘기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임형규 전 삼성전자 사장이 서울 강남구 대치동 사무실에서 반도체 인재 육성 방안을 얘기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삼성전자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1위인 대만 TSMC를 추월하는 데 최소 20년 이상 걸린다고 봅니다. 3나노미터(㎚·10억분의 1m) 공정 양산은 추격을 위한 수단이지 하루아침에 판도를 바꾸진 못할 겁니다. 갈 길이 멀어요.”

‘반도체 산증인’ 임형규 전 삼성전자 사장 인터뷰

메모리와 시스템(비메모리) 반도체 조직을 모두 이끌었던 임형규(69) 전 삼성전자 사장은 최근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파운드리는 공정 기술뿐 아니라 패키징, 설계자산(IP), 수율 관리, 고객 관계 등에서도 우위를 차지해야 완전한 강자가 될 수 있다”며 이같이 평가했다.

임형규는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뒤 1976년 엔지니어로 삼성에 입사했다. 삼성이 반도체 산업에 발을 들인지 1년 뒤다. 해외 연수 1호 직원으로 미국 플로리다대 반도체 공학박사를 취득했다. 낸드플래시 사업의 기반이 된 EEPROM(비휘발성 메모리) 개발을 주도했으며 메모리 개발사업 총괄을 맡아 D램 선두 도약에 역할했다. 2000년부터는 시스템LSI사업부장으로서 초기 시스템 반도체 사업을 이끌었다. 전사 기술총괄, 삼성종합기술원장, 신사업팀장 등도 지냈다. 퇴임 후 삼성 사장 출신으로는 이례적으로 SK로 옮겨 SK텔레콤 부회장, SK하이닉스 사내이사 등을 맡았다. 당시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추천으로 최고경영진이 삼고초려했으며 삼성에도 양해를 구했다고 알려졌다.

임 전 사장이 “20년 후”라고 내다본 것은 삼성전자의 수준을 낮게 평가해서는 아니다. 그는 “2005년 첨단 공정을 본격 시작해 2017년 독립 사업부로 분리한 후발주자인 삼성이 1987년 창업한 TSMC를 추격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성취”라며 “다변화를 원하는 고객, 미·중 경쟁 등 외부 여건은 삼성에 유리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대만은 파운드리에 우수한 기술 인재가 많이 몰리고, 국가 차원의 지원이 많아 추월이 쉽지 않을 것”이라며 “장기적 안목으로 약점을 보완해 나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공정 기술 외 패키징·IP 확보도 중요”

이어 “반도체 한 분야에서 1등을 하려면 1000개 이상의 ‘기술 줄기’가 일정 수준에 올라야 한다”며 “줄기 하나의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10여 명의 엔지니어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런 엔지니어들을 ‘히든 히어로스(숨은 영웅들)’라고 불렀다. 인재 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오는 16일 『히든 히어로스』(디케)를 출간할 예정이다.

이 책은 삼성전자 임원 출신의 양향자 의원(무소속)과 문답 형식으로 구성됐다. 양 의원이 고졸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연구원 보조로 배정됐을 때 임 전 사장이 팀장이었다. 두 사람은 5년 동안 틈틈이 만나 출간 작업을 해왔다.

히든 히어로스 표지. 사진 디케

히든 히어로스 표지. 사진 디케

임 전 사장에게 파운드리는 유독 어려운 과제였다. 2000년대 초 첨단 공정을 위한 전용 생산라인이 필요한데 건설 가능한 부지는 충남 온양(현 아산) 밖에 없었다. 경기도 용인의 기흥공장에서도 한 시간 떨어진 곳이라 인재 확보가 난제였다. 이때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당시 상무)이 메모리용으로 계획된 기흥공장 2층을 쓰도록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초기 파운드리 공장 부지도 못 구해 

당시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선대회장이 시스템 반도체 사업을 미래 성장동력으로 삼아 추진했지만 진행이 쉽지 않았다. 이때 임 전 사장의 말에 가장 귀 기울여준 게 이재용 회장이었다. 임 전 사장은 “이 회장은 많이 물어보며 현안 파악에 열심이었고, 학습 속도도 빨랐다”며 “드라이브는 이 선대회장이 걸었지만 실제 실행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은 이 회장이다. 파운드리는 이재용 회장의 작품”이라고 말했다.

임형규 전 삼성전자 사장이 서울 강남구 대치동 사무실에서 삼성전자의 반도체 기술 발전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임형규 전 삼성전자 사장이 서울 강남구 대치동 사무실에서 삼성전자의 반도체 기술 발전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이 회장과 함께 대만을 방문해 모리스 창 TSMC 창업자를 만났던 일도 소개했다. 창 회장은 삼성의 파운드리 사업 진입 여부를 궁금해했다. 이 회장은 웃으면서 ‘공부하고 있다’는 뜻에서 ‘스터딩(Studying)’ 정도로 답했다고 한다.

이 선대회장과 있었던 일화도 밝혔다. “2000년쯤 회장님 호출로 이기태·이상완·황창규 등 신임 사장들과 전용기를 타고 미국 오스틴에 갔습니다. (이 선대회장이) 회사를 일으켜줘 고맙다며 한 명 한 명과 인사하는데 저를 보더니 ‘임 사장은 부천공장 찾아와’라고 하시더군요. 그때만 해도 엉뚱한 소리를 하신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그 의미를 알겠더라고요.”

삼성 반도체의 시작 ‘부천공장’

삼성은 1974년 경기도 부천에 있는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면서 반도체 사업을 시작했다. 기흥에 뿌리를 내린 것은 83년이다. 임 전 사장 역시 삼성 인수 후 한국반도체에 공채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부천 라인’이다. 그는 “인수할 때 회장님 사재도 넣었다고 알려졌는데 90년대 후반 비메모리 자금 확보를 위해 부천 공장을 팔았다”며 “반도체 시초라 애정이 많으셨던 것”이라고 말했다.

강기동 박사가 설립한 한국 최초의 반도체 업체인 한국반도체 부천 공장의 1974년 모습. 중앙포토

강기동 박사가 설립한 한국 최초의 반도체 업체인 한국반도체 부천 공장의 1974년 모습. 중앙포토

미국 페어차일드에 인수된 이 공장은 페어차일드가 온세미컨덕터에 인수되면서 현재는 온세미컨덕터코리아가 됐다. 이 회사는 자동차용 반도체 분야에서 경쟁력을 보여 삼성전자의 인수합병(M&A) 대상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20여 년 전 이 선대회장의 주문이 아직 유효한 셈이다. 다만 임 전 사장은 “삼성전자가 10년 정도는 파운드리에 집중할 것”이라며 “굳이 M&A를 한다면 패키징이나 IP 회사가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특성화 대학으로 기술 인재 키워야”

임 전 사장은 자국 내 반도체 제조 비율을 높이는 미국의 전략이 한국 반도체 산업의 잠재적 위협 요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2016년쯤 현장에서는 미·중 패권 다툼을 예상했다”며 “한국의 첨단 제조 능력과 미국의 자본, 시장을 묶는 협력 관계를 연구해야 한다. 중국 사업은 서서히 한국으로 옮겨와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이 강해지기 위해서는 기술 인재(히든 히어로)를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 전 사장은 “대만을 보면 반도체 산업과 인재 확보 경쟁을 하는 분야가 많지 않은데 한국은 의과대학, 플랫폼 산업으로 인재가 분산된다”고 우려했다.

“과거 인재 분산으로 반도체 산업을 잃은 일본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합니다. 수요 기업 주도의 반도체·초미세(나노) 기술 특성화 대학 설립도 생각해볼 만하며 1970년대 한국과학원(KAIST의 전신) 설립 같은 파격적 발상도 필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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