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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협상하자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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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사실상' 보유국, 새 접근론 떠올라  

"핵무기 해체 대신 핵위협 제한을"

핵개발 시간 내준 30년 되새겨야

마이클 그린 호주 시드니대 미국학센터 소장·미 CSIS 키신저 석좌

마이클 그린 호주 시드니대 미국학센터 소장·미 CSIS 키신저 석좌

엄청난 규모의 미사일과 핵무기 개발을 계속하는 북한 김정은과 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불가역적인 북한 비핵화를 요구하는 미국·한국 등 동맹국의 대치는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 최근 북한과의 타협을 주장하는 진영에서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하고 출발하자는 것이다.
 안킷 판다 카네기 국제평화재단(CEIP) 선임연구원은 “우리가 원하는 북한이 아닌, 현 모습 그대로 북한을 상대하자”고 한다.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도 북한이 “ICBM 시스템 등 핵무기 운송 체계를 갖춘 핵보유국”임을, 군비 통제 전문가인 짐 루이스는 북한 핵무기 해체가 어렵다는 점을 미국이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워싱턴의 스팀슨 센터는 최근 지크프리트 해커 등 유사한 입장의 전문가들을 불러 세미나를 열었다.
 이들의 주장이 북한을 공식적인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자는 건 아니다. ‘사실상’ 핵보유국인 만큼 이에 기반을 둬 협상 전략을 세우자는 것이다. 탐지가 어려운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은 뺀, 영변 핵시설의 검증 가능한 동결과 제재 해제 교환 등이다. '완전한 비핵화'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북한의 핵 위협은 제한한다는 것이다. 하노이에서 김정은이 트럼프에게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안이다.
 구소련의 핵 군축 합의도 완전한 비핵화 요구 끝에 나온 결과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 상대는 구소련이 아니라 북한이다. 북한은 그간 부분적 합의를 활용해 핵미사일을 고도화했고 종국에는 더 많은 양보를 요구하며 합의를 깨왔다. 19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직후 영변 핵시설을 가동했고, 94년 제네바 북·미 핵 합의서 채택 몇 년 안 지나 우라늄 농축 핵 개발에 나섰다. 2002년 북·일 평양선언, 2005·2008년 6자회담 합의도 휴지장으로 만들었다. 기만의 역사. 구소련에 비할 바 아니다.

2007년 ‘2.13합의’ 발표 후 6자회담 수석대표 기념 촬영. 왼쪽부터 일본 사사에 겐이치로, 한국 천영우, 북한 김계관, 중국 우다웨이, 미국 크리스토퍼 힐, 러시아 알렉산드르 로슈코프 대표. [중앙포토]

2007년 ‘2.13합의’ 발표 후 6자회담 수석대표 기념 촬영. 왼쪽부터 일본 사사에 겐이치로, 한국 천영우, 북한 김계관, 중국 우다웨이, 미국 크리스토퍼 힐, 러시아 알렉산드르 로슈코프 대표. [중앙포토]

 북한 정권은 핵 군축 합의 과정에서 제재 해제부터 요구할 텐데, 제재 해제는 핵 개발에 필요한 물질과 기술 확보를 도와 핵 개발 속도만 높인다. 한국 등의 억지력은 약화한다. 제네바 합의 이후를 보자. 북한은 느슨해진 국제 사회 분위기를 틈타 HEU 프로그램 필수 장비인 원심분리기 등을 들여왔다. 2007년 6자회담에서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 제재가 풀린 뒤 핵실험을 재개했다. 그 후 국제 사회가 북한의 핵확산 자금 조달을 옥죄는 글로벌 네트워크를 재구축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2018년 트럼프가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조언대로 한·미 군사훈련을 중단한 뒤 약화한 연합방위태세를 복구하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문재인 정부가 북한을 자극할까 봐 스스로 손발을 묶은 탓도 있다. 북한을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고 핵 군축 협상을 하려면 우리의 방어력 약화라는 대가를 치를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북한과 새로운 접근법으로 협상하는 과정은 북한을 법적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미국의 동맹과 국제 사회의 약속이 갖는 신뢰를 크게 훼손하는 일이다. 브루스 클링너 헤리티지재단 선임연구원의 말처럼 11개 유엔안보리 결의안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일이다. 합의를 위해 북한을 달래는 건 아시아의 모든 미국 동맹국(한국의 진보 좌파세력을 빼고)을 동요시킨다. 북한과 중국, 러시아에 맞서 있는 우리가 피해야 할 시나리오다. 북한이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받는 걸 가장 원하는 이는 푸틴과 시진핑이다. 미국 동맹 체제의 약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제재와 억지로 북한의 핵 야심을 꺾는 접근법은 빠른 결실을 원하는 이들에겐 성에 차지 않을 수 있다. 북한 정권 전복은 리스크가 너무 커 선택지가 될 수 없다. 지난 30년의 경험으로 우리는 북한 정권을 달래려 요구를 들어주면 단기 결과는 얻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론 더 큰 리스크를 사는 결과로 이어짐을 배웠다. 핵 군축 전문가들이 '새로운 접근법'을 호소하지만, 미국과 한국, 일본 정부가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바이든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은 '완전한 비핵화'를 포기하지 않고 북한과 신뢰 구축이나 (군비)통제를 이룰 수 있을지를 가늠하기 위한 외교에 진력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건 억지(deterrence)다. 그렇다고 이를 뒷받침하는 외교적 노력을 안 할 이유는 없다.

'사실상' 보유국, 새 접근론 떠올라 #"핵무기 해체 대신 핵위협 제한을" #핵개발 시간 내준 30년 되새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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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그린/ 호주 시드니대 미국학센터 소장·미 CSIS키신저 석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