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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변양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병사봉급 인상은 첫 단추…언젠가 모병제로 가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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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주정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변양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진영을 넘어 미래를 그리다 〈11〉 국방개혁 2020과 모병제 논의

변양균 전 기획예산처 장관

변양균 전 기획예산처 장관

‘세상은 참으로 불평등하다.’ 나는 군대에서 이 말을 절감했다. 사실 행정고시에 합격했기 때문에 장교로 갈 수 있는 처지였다. 그런데 일반 병사로 가겠다고 자청했다. 밑바닥 생활을 경험하고 싶었다. 나름 순수한 마음에서 선택했는데 곧 후회했다.

나는 1973년 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가을 행시에 합격했다. 사무관으로 임용되고 첫 보직이 조달청 차장 비서관이었다. 그때만 해도 조달청 위세는 대단했다. 전국 부두 물동량의 80%가량이 조달청 소관이었다. 식량이 풍족하지 않던 시절에 쌀이나 소고기 수입도 조달청이 맡아서 했다. 나로선 20대 젊은 나이에 너무 좋은 대접을 받았다.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74년 가을에 입대해 충남 논산훈련소로 갔다. 수용연대(현 입소대대)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후회가 밀려왔다.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밥에선 냄새가 났다. 내가 속한 훈련소 내무반은 대부분 국민학교(초등학교)만 나온 사람들이었다. 중학교 졸업자도 좀처럼 보기 어려웠다.

기초훈련을 마치고 강원도 철원의 6사단으로 배치를 받았다. 겨울이면 영하 20도의 강추위에 경계 근무를 섰다. 총기 사고를 방지한다며 총알이 없는 빈 총을 들고 나갔다. 어느 날 사단 군법회의(군사재판)에서 법무 서기를 맡을 사람을 찾았다. 원래 준위급 보직인데 마땅한 사람이 없어 나에게 시켰다. 그렇게 법무 교육을 담당하며 공병대 일과를 지켜본 기억이 난다. 그들은 최전방 철책선 보수 등 끊임없는 작업에 시달렸다. 워낙 고된 생활에 탈영병이 생길까 봐 휴가 기간에도 개인행동을 금지하고 단체로 다니게 했다.

“사람 귀한 줄 알아야 군대도 변해”
장기 과제로 모병제 도입안 검토
조기 입학에 군 복무기간 단축해
사회 진출 당기는 전략 추진했다

그러다 국방부 본부 수송계를 거쳐 국방대학원으로 전출됐다. 그곳 병사들은 장교가 내무반 청소를 시키면 투덜댔다. 내무반 청소도 용역 직원이 대신할 정도로 편한 분위기였다. 전방과 비교하면 극과 극이었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예전 군대는 부대 배치와 보직에 따라 생활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내가 모병제 소신을 갖게 된 바탕에는 이런 군대 시절 경험이 있었다.

“그 많은 국방예산 어디에 썼나”

2006년 초여름 충남 계룡대에서 열린 국방개혁 간담회에서 김장수(왼쪽 둘째) 육군 참모총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성일 공군 참모총장, 김장수 총장, 변양균 기획예산처 장관, 남해일 해군 참모총장. [사진 변양균]

2006년 초여름 충남 계룡대에서 열린 국방개혁 간담회에서 김장수(왼쪽 둘째) 육군 참모총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성일 공군 참모총장, 김장수 총장, 변양균 기획예산처 장관, 남해일 해군 참모총장. [사진 변양균]

그 후 30년가량 지났다. 나는 2005년 1월 기획예산처 장관 임명장을 받았다. 예산을 총괄하는 입장에서 다른 부처 업무에 관여할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때 국방부의 당면 과제는 국방개혁이었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런 일이 있었다. 국방부가 남북한 전력의 비교 자료를 노 대통령에 보고했다. 북한이 보유한 탱크는 얼마인데 우리는 훨씬 적다. 다른 분야에서도 우리 전투력이 열세다. 전쟁이 벌어지면 우리가 이기기 어렵다. 그러니 국방비를 더 투입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 자리에는 나도 참석했다. 솔직히 이해되지 않았다. 당시 국방예산은 국내총생산(GDP)의 3% 수준이었다. 우리 GDP는 북한의 약 30배였다. 따라서 우리 국방예산은 북한의 GDP 총액과 맞먹었다. 이런 점을 들어 의문을 제기했다. “남북한 경제 격차가 커지고 우리 국방예산이 북한을 능가한 지 수십 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북한이 아직도 우리보다 우세하다는 게 이해가 안 됩니다. 그동안 돈을 어디에 썼다는 겁니까.”

노 대통령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국방부 보고를 받으며 화를 냈다. “이런 식으로 보고하려면 하지 마세요.” 할 수 없이 윤광웅 국방장관이 나중에 자료를 수정해 다시 보고한 적이 있다.

그 무렵 나는 ‘비전 2030’을 만드는 작업에 매달려 있었다. 정부가 어떻게 돈을 써서, 나라를 어떤 모습으로 바꾸겠다고 설명한 장기 계획서다. 비전 2030에는 청년 인적자원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활용할 것인가 하는 내용도 있었다. 다른 나라에 비해 청년의 사회 진출이 늦은 게 고민거리였다. 이걸 앞당기려면 군 복무 부담을 덜어줘야 했다.

국방부가 ‘국방개혁 2020’을 발표한 건 2005년 9월 13일이었다. 여기엔 군 병력을 단계적으로 감축하는 계획도 있었다. 당시 68만 명이던 총병력을 2020년까지 50만 명으로 줄이기로 했다. 공식 발표를 앞둔 9월 1일 대통령이 참석한 내부 회의를 열었다. 노 대통령이 기획예산처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 함께 지시했다. 그 중엔 징병제를 유지할지, 모병제를 도입할지 신중하게 검토해 보라는 것도 있었다.

3군 참모총장 만나 개혁안 설명

변양균 전 기획예산처 장관이 20대 중반 병사로 입대했던 시절 총을 들고 경계 근무 포즈를 취한 모습.

변양균 전 기획예산처 장관이 20대 중반 병사로 입대했던 시절 총을 들고 경계 근무 포즈를 취한 모습.

2006년 3월 비공개 내부 보고서를 작성해 노 대통령에 보고했다. 제목은 ‘청년 인적자원의 효율적 활용방안’이었다. 독일 모델을 참고해 병역의무를 투트랙(두 가지 경로)으로 구분했다. 하나는 군부대 현역 복무, 다른 하나는 복지시설 등에서 일하는 사회 복무였다.

주요 내용은 이랬다. 현역은 복무 기간을 18개월로 단축하고 월급도 대폭 올려준다. 사회 복무는 현역보다 기간을 8개월 정도 길게 한다. 병영 생활환경은 획기적으로 개선한다. 그러면 억지로 시키지 않아도 현역 복무를 선호할 것으로 기대했다. 전·의경이나 교정시설 경비교도대는 단계적으로 폐지하자고 했다.

그 배경에는 노동집약 군대에서 기술집약 군대로 바꿔나가자는 구상이 있었다. 병역의무란 명목으로 청년들을 거의 공짜로 데려다 쓰겠다는 발상에서 벗어나야 했다. 인건비가 비싸지면 자연스럽게 첨단장비를 찾는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봤다. 모병제는 당장 도입하기 어려우니 장기과제로 추진하자고 했다.

2006년 초여름이었다. 윤광웅 장관이 도움을 청해왔다. 나보고 육해공군 참모총장을 만나 국방개혁과 병역 개편 방안을 설명해 달라고 했다. 대강 짐작이 갔다. 해군 출신인 윤 장관으로선 육군 등을 설득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충남 계룡대에 1박 2일 일정으로 갔다. 3군 참모총장과 저녁을 먹으며 호소했다. “지금 병력 운용의 비효율성이 심하지 않습니까. 이대로는 안 됩니다. 병사들 처우를 개선해야 합니다. 그게 진정으로 국방력을 강화하는 길입니다.”

열심히 설명했는데 반응이 차가웠다. 찬성도 반대도 아니고 침묵이었다. 3군 참모총장들도 노 대통령의 국방개혁 의지를 알고 있었다. 내 설명이 사실상 대통령 메시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 대놓고 반박하지 못했다. 흔쾌히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관료 사회도 개혁이 쉽지 않은데, 군대는 훨씬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 장관은 2006년 10월 사의를 밝혔다. 노 대통령은 후임으로 군 출신이 아닌 민간인 국방장관을 깊이 고민했다. 유력 후보는 장영달 의원이었다. 4선 의원으로 국회 국방위원장을 한 경력도 있고 본인도 강하게 희망했다. 하지만 김장수 육군 참모총장을 후임 장관에 임명했다. 노 대통령은 나중에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국방부 문민화, 민간인 국방장관을 임명하는 문제는 좀 뒤로 미뤘습니다. 한꺼번에 다 그렇게 해 놓으면 어지러워서 안 될 것 같아서요.”

‘5년 일찍 취직, 5년 늦게 퇴직’ 구상

모병제에 대해 노 대통령과 얘기한 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경제적 관점에서 모병제의 필요성을 말했다. 사실 군대에 가는 사람은 자기가 노동시장에서 받을 수 있는 돈 만큼 세금을 내는 셈이다. 이런 식으로 숨어있는 기회비용이 연간 수십조원이라고 봤다. 노 대통령은 양심적·종교적 병역 거부 논쟁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는 점에서 모병제를 찬성했다. 하지만 국민과 군을 설득하는 게 너무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다. 우선 국방개혁을 추진하되 장기적으로 모병제로 가는 바탕을 만들자고 했다.

2006년 12월 1일 국방개혁기본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2020년까지 단계적으로 추진할 국방개혁 방안을 법제화했다.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군 복무 기간과 연계한 ‘생애 근로시간 연장’이 중요한 과제였다.

그때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불명예 1위를 차지한 통계가 있었다. 근로자 1인당 연간 근로시간이었다. 그런데 생애 전체로 보면 근로시간이 절대 길지 않았다. 우리는 선진국에 비해 10년가량 짧게 일했다. 상대적으로 늦게 사회에 진출하고 일찍 은퇴하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생애 소득은 적고 자산축적도 불리했다. 반면 일하는 기간에는 과잉 노동에 시달렸다. 생활의 질이 안 좋을 수밖에 없었다.

내부적으로 ‘5+5 전략’이란 이름을 붙였다. ‘5년 일찍 취직하고 5년 늦게 퇴직하기’란 의미였다. 초등학교 입학 연령을 1년 앞당기고 초중고 교육 기간을 1년 단축하는 내용을 담았다. 군 복무 기간은 18개월로 단축하자고 했다. 대통령 임기가 1년여밖에 안 남았기 때문에 시간이 없었다.

2007년 2월 5일 한명숙 총리가 ‘2+5 전략’을 발표했다. ‘2년 일찍 취직하고 5년 늦게 퇴직하기’라고 했다. 이름이 좀 달라졌지만 큰 틀에선 비슷한 내용이었다. 다만 초중고 학제 개편은 사회적 공론화 과정을 거치기로 했다. 이후 정권이 바뀌면서 국방개혁도, 2+5 전략도 원래 구상과 비교해 많이 달라졌다.

올해 들어 반가운 소식이 있었다. 윤석열 정부의 병사 월급 200만원 인상 계획이다. 나는 적극 찬성이다. 궁극적으로 모병제를 하려면 병사봉급을 대폭 인상해야 한다. 병사봉급부터 올리는 건 일의 선후가 바뀐 감은 있다. 그렇더라도 모병제로 가기 위해 중요한 걸림돌을 치우는 효과가 있다. 귀중한 청년 인력을 데려다 쓰면서 적절한 대가를 지불하는 건 당연하다. 이렇게 해야 노동집약 군대에서 기술집약 군대로 바뀐다. 언젠가 우리도 사회적 합의를 토대로 모병제로 전환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정리·대담=주정완 논설위원,  이정재 전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변양균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는 다음 주부터 매주 화요일자로 옮겨서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