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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반지 대신 이 팔찌를" 60년대에 젠더리스 컨셉, 뉴요커 홀린 까르띠에 [더 하이엔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 올해 연말은 그 어느 때보다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코로나 19로 잃어버렸던 연말의 즐거움과 따뜻함을 되찾아주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명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실제 소비로 이어지는 요즘. 홀리데이 시즌을 맞아 주목해야 할 하이엔드&럭셔리 제품들을 모아 7회에 걸쳐 소개하는 '홀리데이 럭셔리 투어'를 진행합니다. 이번 회는 까르띠에의 주얼리 '러브'와 '저스트 앵 끌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편집자 주〉

홀리데이 럭셔리 투어②   
까르띠에 러브 & 저스트 앵 끌루

금장 장식의 빨간 까르띠에 박스. '연말 선물'이라고 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미지다. 사진 까르띠에

금장 장식의 빨간 까르띠에 박스. '연말 선물'이라고 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미지다. 사진 까르띠에

'선물'이란 말을 들었을 때 머릿속에 딱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금박으로 장식된 빨간 박스. 바로 프랑스 럭셔리 브랜드 '까르띠에'의 박스다. 그 안에 담긴 보석과 주얼리는 175년의 역사가 만들어낸 이야기를 담고, 단순한 액세서리를 넘어 사랑의 약속이 되고, 애정의 증표가 된다.

까르띠에는 1847년 프랑스 파리의 작은 보석 아틀리에로 시작했다. 주얼리와 워치메이킹·향수·가죽·액세서리 등 카테고리를 아우르며 지금까지 혁신적인 디자인과 장인 정신을 바탕으로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주얼리 분야에서는 다른 브랜드와는 비교할 수 없는 독보적인 포지셔닝을 갖는다. 20세기 초 영국 왕 에드워드 7세는 까르띠에를 "왕의 보석상, 보석상의 왕"이라 칭송하기도 했는데, 이 말은 지금까지 메종을 대표하는 키워드가 됐다.

1899년 까르띠에는 파리 뤼 드 라 뻬 13번지로 자리를 옮겨 브랜드의 초석을 다진다. 사진은 1912년경 당시 부티크 모습. 사진 까르띠에(Archives Cartier Paris, Andre Taponier)

1899년 까르띠에는 파리 뤼 드 라 뻬 13번지로 자리를 옮겨 브랜드의 초석을 다진다. 사진은 1912년경 당시 부티크 모습. 사진 까르띠에(Archives Cartier Paris, Andre Taponier)

에드워드 7세가 1904년 3월 10일에 까르띠에에 수여한 왕실 납품 허가증. 사진 까르띠에(Cartier Archives Londres)

에드워드 7세가 1904년 3월 10일에 까르띠에에 수여한 왕실 납품 허가증. 사진 까르띠에(Cartier Archives Londres)

175년의 역사만큼이나 까르띠에는 많은 히트작을 냈다. 특히 출시 후 지금까지 지속해서 이어져 오는 주얼리와 시계들은 브랜드 최고의 수익원이자, 브랜드의 정체성을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반석 같은 존재들이다. 주얼리 중에서 최근 국내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모델은 단연 'LOVE(러브)'와 못을 모티프로 한 '저스트 앵 끌루' 컬렉션이다. 두 컬렉션은 브랜드의 아이코닉한 제품으로 출시 직후부터 지금까지 인기가 높았는데 이를 만든 사람은 한 사람, 주얼리 업계의 전설적인 디자이너로 꼽히는 알도 치풀로다.

1977년 스콜피오 펜던트와 네일 브레이슬릿을 착용한 알도 치풀로의 모습. 사진 까르띠에(ⓒOscar Buitrago)

1977년 스콜피오 펜던트와 네일 브레이슬릿을 착용한 알도 치풀로의 모습. 사진 까르띠에(ⓒOscar Buitrago)

알도 치풀로는 1970~80년대 초반 활발하게 활동하며 명성을 얻은 주얼리 디자이너다. 4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비운의 디자이너로도 잘 알려진 인물. 그는 42년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대대로 주얼리를 만들어온 주얼러 가문에서 태어났다. 청년기엔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에서 수학했고, 졸업 후엔 바로 미국 보석 브랜드 '데이비드 웹(David Webb)'과 '티파니 앤 코(Tiffany & Co.)' 등을 거치며 자신만의 세계관을 만들어 나갔다.

그가 까르띠에에 합류한 것은 69년, 그의 나이 27세 때다. 당시 까르띠에 뉴욕의 대표였던 마이클 토마스의 제안으로 티파니에서 자리를 옮긴 그는 젊은 디자이너의 감각을 한껏 발휘하며 당시 유행하던 글래머러스한 디자인을 벗어나, 언제 어디서든 편하게 착용할 수 있는 미니멀한 디자인의 주얼리를 만드는 데 주력했다. 입사한 해 작은 스크루 드라이버를 함께 제공해, 착용할 때 사용하게 한 팔찌(LOVE 브레이슬릿)를 만들어 히트시키더니, 2년 뒤인 71년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못을 팔찌로 만든 저스트 앵 끌루 컬렉션의 전신인 '네일(Nail, 못을 의미)' 브레이슬릿을 세상에 내놨다. 그의 디자인은 '시대를 한발 앞섰다'는 평가를 받으며 지금까지 까르띠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주얼리 중 하나로 살아 숨 쉬고 있다.

사랑의 유대감을 담다 ㅣ LOVE

사랑의 결속과 유대감을 담은 팔찌, 까르띠에 LOVE 브레이슬릿. 사진 까르띠에(Haw-lin Services)

사랑의 결속과 유대감을 담은 팔찌, 까르띠에 LOVE 브레이슬릿. 사진 까르띠에(Haw-lin Services)

까르띠에가 69년 발표한 LOVE 컬렉션은 이름 그대로 '사랑'을 표현하는 주얼리다. 지금까지 50년 넘게 사랑의 징표로 사랑받아 온 것은 모던한 디자인뿐 아니라 이 브레이슬릿의 독특한 착용 방법 때문이기도 하다. 이를 착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사람이 필요한데, 착용자 외의 다른 이가 전용 드라이버로 나사를 풀고 조여 줘야 한다. 감정적인 유대감을 강조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인데, 여기에는 알도 치풀로의 개인적인 일화가 담겨 있다.

그는 LOVE 브레이슬릿을 만든 계기에 대해 "너무 슬펐어요. 누구도 내게서 그 추억을 가져가지 못하게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영원한 사랑의 상징을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 후 잠을 못 이루던 어느 날 새벽 3시, 문득 '간직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오직 추억뿐'이라는 생각을 떠올렸다고. 이를 붙잡아 둘 방법을 고민하던 그는 추억을 말 그대로 '잠가버려서' 달아나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잠금장치에서 영감을 받은 팔찌를 디자인했다. 이것이 LOVE 브레이슬릿이다.

당시 작은 드라이버로 팔찌 나사를 조여야 착용할 수 있는 착용법은 이전엔 보지 못했던 것으로 가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매일 부담 없이 착용할 수 있는 '신체의 일부' 같은 주얼리를 꿈꿨던 그는 평소 좋아했던 공구를 주얼리 세계에 끌어들였고, 이는 직관적이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또한 남녀 구분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젠더리스 컨셉은 당시 뉴욕 사회에서 유행했던 유니섹스(※당시엔 그렇게 불렀다) 트렌드와도 맞닿아 있어 인기를 끌 만했다. 그는 LOVE 브레이슬릿이 약혼반지를 대신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고 한다.

1969년 알도 치풀로가 디자인하고 까르띠에가 제작한 최초의 LOVE 브레이슬릿. 안쪽에 알도 치풀로의 시그니처가 각인돼 있다. 사진 까르띠에(Nils Herrmann, Collection Cartier)

1969년 알도 치풀로가 디자인하고 까르띠에가 제작한 최초의 LOVE 브레이슬릿. 안쪽에 알도 치풀로의 시그니처가 각인돼 있다. 사진 까르띠에(Nils Herrmann, Collection Cartier)

1970년 LOVE 브레이슬릿의 광고 이미지. 남녀 모두 같은 팔찌를 하고 손잡고 있는 모습을 그려, 약혼반지 대신 이 팔찌가 활용되길 바랬다. 사진 까르띠에

1970년 LOVE 브레이슬릿의 광고 이미지. 남녀 모두 같은 팔찌를 하고 손잡고 있는 모습을 그려, 약혼반지 대신 이 팔찌가 활용되길 바랬다. 사진 까르띠에

팔찌에서 시작해 LOVE 컬렉션은 이후 반지, 목걸이, 귀걸이 등 다양한 주얼리 상품으로 디자인됐다. 사진은 핑크 골드와 화이트 골드로 만든 LOVE 링. 사진 까르띠에

팔찌에서 시작해 LOVE 컬렉션은 이후 반지, 목걸이, 귀걸이 등 다양한 주얼리 상품으로 디자인됐다. 사진은 핑크 골드와 화이트 골드로 만든 LOVE 링. 사진 까르띠에

못, 대담한 정신을 상징하다 ㅣ 저스트 앵 끌루

못이라는 평범한 물건을 '대담함'의 상징물로 만든 까르띠에 저스트 앵 끌루. 사진 까르띠에(Haw-lin Services)

못이라는 평범한 물건을 '대담함'의 상징물로 만든 까르띠에 저스트 앵 끌루. 사진 까르띠에(Haw-lin Services)

못의 형상을 본딴 저스트 앵 끌루 컬렉션은 알도 치풀로가 록 오페라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를 본 뒤 고안해낸 주얼리다. 어느 날 밤 기독교 관련 서적을 읽던 그는 '인간이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을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용기'라는 문단을 보게 되고, 한동안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한다. 이후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파격적인 형식과 극 중 연주되는 록 음악의 자유분방함에 사로잡힌 치풀로는 록 오페라가 끝난 뒤 24시간 만에 예수의 몸에 박힌 못에서 영감을 받아 팔찌를 만든다. 단순하고 순수한 디자인만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하드웨어 컨셉 주얼리를 디자인해낸 것. 71년 출시 당시 이름은 네일(Nail) 브레이슬릿이었는데, 이 단어는 손톱 외에도 못을 의미한다. 이후 2012년 다시 컬렉션이 부활하며 '그저 못'으로 풀이할 수 있는 프랑스어 '저스트 앵 끌루(Juste Un Clou)'로 발전했다.
단순해 보일지 몰라도 주얼리가 된 못 모티프에는 순수한 라인, 정확한 형태, 정밀한 비율, 고귀한 디테일이라는 까르띠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4가지 디자인 철학이 담겨있다. 미니멀리즘에 기반을 둔 디자인이지만, 아치 모양의 조각 2개가 겉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숨겨진 걸쇠로 연결돼 있어 착용이 편리하다. 못의 머리 부분과 끝부분이 손목 위에 놓이는 위치는 균형감 있게 계획되어 있고, 못의 앞면엔 실제 공구함에서 가져온 납작한 못에서 가져온 4~5개의 가는 선이 새겨져 있다. 어디에서나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까르띠에의 비전과도 같다.
알도 치풀로는 종종 "나의 두 번째 집은 철물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취향을 러브 컬렉션에서는 드라이버와 나사로, 저스트 앵 끌루에서는 못을 내세워 주얼리에 성공적으로 반영했다. 브랜드가 추구하는 '대담한 정신'을 못이라는 평범한 물건을 통해 강렬하게 표현했다. 고급 주얼리에 우리 주변의 평범한 물건을 사용한다는 발상의 전환도 저스트 앵 끌루의 매력이자 성공요소였다.

저스트 앵 끌루의 디자인 스케치. 사진 까르띠에

저스트 앵 끌루의 디자인 스케치. 사진 까르띠에

1971년 알도 치풀로가 처음 디자인했던 네일 브레이슬릿. 2012년 부활한 저스트 앵 끌루의 전신이다. 사진 까르띠에

1971년 알도 치풀로가 처음 디자인했던 네일 브레이슬릿. 2012년 부활한 저스트 앵 끌루의 전신이다. 사진 까르띠에

다이아몬드를 세공한 저스트 앵 끌루 목걸이. 사진 까르띠에

다이아몬드를 세공한 저스트 앵 끌루 목걸이. 사진 까르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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