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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재의 ESG인사이트] 쉬운 정책으론 똑똑한 시장 못 이긴다

중앙일보

입력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

‘코브라 패러독스(paradox)’라는 말이 있다. 영국 식민 시대의 인도 델리에서 실제 일어났던 사건에서 만들어진 용어다. 당시 델리에서는 맹독성 코브라가 창궐해 인명 피해가 극심했다. 급기야 영국 총독부는 코브라 머리를 잘라 오는 시민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인센티브를 통한 코브라 박멸 정책인 셈이다.

하지만 이 정책은 일부 델리 시민들의 기업가정신을 자극했다. 보상금을 노린 이들이 코브라를 직접 사육하기 시작했고 일정 기간이 지나자 총독부에 신고되는 코브라 개체 수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코브라 사육이 횡행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 영국 총독부는 보상금 정책을 폐지했다. 코브라가 좌초 자산(Stranded Asset)으로 전락하자 많은 사육농가들은 코브라를 방치하거나 관리를 포기했다. 델리에는 농가를 탈출한 코브라가 더욱 창궐했다. 보상 정책 도입 이전보다 코브라의 개체 수가 더 증가한 것이다.

2001년 독일의 경제학자인 호르스트 지베르트(Horst Siebert)는 ‘코브라 효과(The Cobra Effect)’라는 책을 통해 이 정책의 역설을 꼬집었다. 좋은 의도를 가진 간편한 정책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 준다.

이 ‘코브라 효과’와 유사한 현상은 여러 부문의 정책들에서 일어날 수 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국내의 기업 소유·지배 구조 정책에서도 이와 같은 역설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 대기업들의 부채 의존적 문어발식 확장, 소유 집중 문제가 외환위기의 주범으로 지목되자 이후 김대중 정부에서는 다각적인 정책들을 제시했다. 경영 투명성 제고, 상호지급 보증 해소, 소수주주권 강화, 사외이사 제도 도입, 순환출자 억제 및 부당 내부거래 근절 등이 그것이다.

당시 재벌들은 외환위기의 주범이라는 따가운 비판을 받던 터라, 관련 법적 정책적 요건들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 외에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지배주주의 경영 책임과 경영현황에 대한 공시를 강화했다. 무엇보다 내부통제 강화 차원에서 도입된 사외이사 제도를 충실히 따랐다. 자산 2조 이상 기업들의 경우 사외이사로 구성된 감사위원회 설치도 했다.

이후 해외 기관들은 한국의 소유·지배 구조에 대해 상향된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예컨대 홍콩의 CLSA와 아시아 기업지배구조협회(ACGA)가 발간하는 ‘CG Watch 2005’에 따르면 한국은 아시아 10개국 중 5위 수준으로 평가받았고 99년부터 2004년까지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인도 다음으로 그 개선 폭이 큰 것으로 조사됐다.

하지만 위기감에는 시효가 있다. 결코 오래 지속하지 못한다. 일정 기간이 지나 상황이 호전되면 정책 당국자도, 여론의 집중력도 약화하는 법이다. 정부가 정책을 만들면 시장은 대책을 만든다고 했던가. 그 약화한 시점에서 ‘정책’에 대한 관련 당사자들의 ‘대책’이 준동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보자. 지배주주와 경영진에 대한 견제 장치로 도입된 사외이사 제도의 핵심은 ‘누가 사외이사로 선임되는가’다. 여기서 독립성과 전문성은 필요조건이며, 이사로서의 헌신, 용기, 윤리의식이 더해질 때 그 충분조건이 완성될 수 있다. 어느 하나도 갖추지 못하면 사외이사로서 제 역할을 다할 수 없고, 결과적으로 해당 기업의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한국 기업들은 이 틈을 파고들었다. 즉 대다수의 사외이사들은 지배주주나 경영진과의 친소관계나 인연에 따라 추천되고 선임된다. 기업 경영의 경험과 전문성보다는 명망가, 교수, 전직 고위 공무원, 변호사 등이 그 자리에 앉는다. 경험 부재, 전문성 빈곤에 더해 비상근 직으로서 정보 비대칭성이 작동하고, 5000만원에서 1억원 수준의 연봉에 연임 욕심까지 내면 사외이사들은 대개 거수기로 전락한다. 소수주주권의 관점에서 지배주주에 대한 견제와 균형이라는 사외이사 본연의 역할은 기대하기 어렵다. 여기서 사외이사 제도는 형해화된다.

그 외에도 편법적 경영권 승계의 고전적 수단이었던 저가 전환사채(CB)나 신주인수권부사채(BW) 발행은 일감 몰아주기, 불공정한 자기매매(Self-dealing) 구조 하에서의 합병 분할 쪼개기 상장 등의 방식으로 진화 발전해 왔다. 순환출자에 의한 가공자본 창출의 문제에 대한 규제책으로 도입된 지주사 제도에서는, 지주사 자회사들 간 터널링, 지주사의 자회사 보유지분율 하락, 지주사 전환 시 자사주 의결권 부활의 마법이라는 신묘한 대책들로 피해 나갔다.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 자본시장과 상장기업에서 일어났던 일들이다. 이 ‘정책’과 ‘대책’ 간 반복된 샅바 싸움의 결과는 어떠했을까. 최근 CLSA와 ACGA가 발간한 ‘CG Watch 2020’을 보면 아시아 12개국 중 한국의 기업 지배구조 순위는 말레이시아, 인도, 태국보다 뒤처진 9위 수준이다. ACGA는 한국 기업들의 소주 주주 보호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사외이사의 독립성 수준, 의무공개매수 제도의 부재, ESG 정보공개 수준 미약 등을 지적했다.

그렇다면 한국 기업 소유·지배 구조 문제에서 ‘코브라 패러독스’를 최소화하면서 어떻게 실효적 성과를 낼 수 있을까. 필자는 시장은 시장으로 다스리는 ‘이이제이(以夷制夷)’적 접근을 제안한다. 기실 규제자가 시장 플레이어들의 창의성과 유연성을 선험적으로 파악하여 정책을 설계할 수는 없다. “열 사람이 한 명의 도둑을 못 잡는다."라는 격언이 나온 배경이다. 따라서 소유·지배 구조의 핵심 이해관계자이자 시장 참여자인 기관투자자들로 하여금 시장과 지배주주를 견제토록 하는 것이다.

국내 기관투자자들은 크게 네 그룹으로 나뉜다. 첫째 재벌 계열 운용사, 둘째 금융지주사 계열 운용사, 셋째 독립계 운용사, 마지막으로 국민연금을 위시한 공적 연기금이다. 여기서 첫째·둘째 유형의 운용사들은 그 소유·지배 구조나 재벌기업들과의 거래 관계 등으로 제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 셋째 독립계 운용사들은 그 운용 규모가 작아 영향력의 한계가 있다. 마지막 공적 연기금들은 정부 산하기관이라는 점에서 관치 프레임에 갇혀 운신의 폭이 제한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은 각 기관투자자의 소유·지배 구조를 개선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간단치 않다. 특히 국민연금 기금 운용 지배 구조 개혁의 경우 부처 간, 여야 간, 이해집단 간 첨예한 의견 대립으로 인해 그 절충점을 찾기 어렵다. 따라서 현실적 대안은 기왕에 그들이 도입한 ‘수탁자 책임 원칙(스튜어드십 코드)’를 보다 실효적으로 개선하는 것이다.

개선의 실마리는 국내 최대 투자 기관인 국민연금의 수탁자 책임 활동에서 찾아야 한다. 이들이 주주 관여 활동을 더욱 강화해 투자 대상 기업의 경영활동을 상시적으로 감시하고 대화하며, 필요한 경우 주주제안권 행사를 통해 사외이사 후보도 적극적으로 추천해야 한다. 국민연금이 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한다면 시장에 주는 시그널링 효과(Signaling effect)는 매우 클 것이다. 연금의 이러한 활동은 법으로 보장된 주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는 가장 시장적인 투자 행위이다.

이를 통해 한국 상장 기업들의 고질적인 지배 구조 문제가 개선된다면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통한 연기금들의 중장기적 투자이익 제고도 기대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코브라의 천적이자 사람을 해치지 않는 거북이 등의 개체 수를 늘려 코브라를 제거하는 ‘이이제이’적 정책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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