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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달의 예술

이자람과 헤밍웨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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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음대 교수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음대 교수

“겉으로는 평안해 보이지만, 내면은 복잡하고 프로페셔널하게 바쁜 산티아고의 마음을 소리꾼 이자람이 한번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구성진 판소리 열창이 추운 겨울날 한국의 청중을 쿠바 코히마르 마을의 한 바닷가로 이끌었다. 소리꾼 이자람의 ‘노인과 바다’ 공연이 지난 9~10일 마곡에 새롭게 오픈한 서울 LG아트센터에서 열렸다. 전통 판소리를 자신의 개성적인 예술관으로 현대적이고 새롭게 변화시켜 명성을 얻고 있는 이자람의 이번 공연 주제는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였다. 망망대해에서 고기와 사투를 벌인 한 노인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실존 문제를 파헤친 헤밍웨이의 작품이 판소리로 새롭게 옷을 입은 특별한 무대였다.

판소리로 만나는 ‘노인과 바다’
이자람의 압도적인 카리스마
전통과 현대 경계 넘어선 소리

한국 판소리의 현대화에 앞장서고 있는 소리꾼 이자람. [연합뉴스]

한국 판소리의 현대화에 앞장서고 있는 소리꾼 이자람. [연합뉴스]

이자람은 8시간에 이르는 ‘춘향가’를 스무 살의 나이에 최연소로 완창한 정통 국악 분야의 대표주자로 출발하여, 전통 판소리와 서양의 문화를 결합하여 현대적인 예술로 변모시키는 실험을 통해 ‘판소리의 현대화’에 주력했다. 대표작 ‘사천가’(2007)는 독일 극작가 브레히트의 『사천의 선인』을 뚱녀 순덕이를 주인공으로 삼아 한국식으로 각색한 작품이다. 판소리와 함께 베이스 기타, 드럼, 타악기 등의 밴드 연주단과 삼바 재즈 등 서양의 대중적 음악양식을 결합하여 판소리의 지평을 넓히며 국제적으로 큰 명성을 얻었다.

이번 ‘노인과 바다’ 또한 이자람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는 무대였다. 넓은 무대 위에 반주를 맡은 고수 이준형을 동반한 이자람은 오롯이 두 시간여 동안 천여 명의 관중을 사로잡았다. 창과 아니리를 중심으로 일인 다역(多役)을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소화한 그는 먼저 낭낭한 아니리로 ‘해설자’ 역할을 했다. 산티아고가 얼마나 멋진 어부였으며, 청새치를 낚는 과정이 어떠했는지를 생생하게 노래했고, 또한 바다가 얼마나 푸르고 한 인간에게 고독감을 불러오는지도 알려주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역할은 주인공 산티아고였다. ‘고기다! 이런 놈은 처음이다’, ‘나는 널 죽여야 한다’ 등 산티아고의 처절한 독백을 쩡쩡한 창으로 목이 쉬어라 부르며, 이자람은 산티아고의 내면을 연기했다. 동시에 산티아고를 바라보는 동네 사람과 산티아고의 수제자 니꼴의 심정도 마치 연극배우처럼 재연했다.

더 흥미로운 역할은 청중과 소통하는 안내자였다. 전통적 판소리에서 ‘청중’의 역할이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이자람은 객석을 빼곡 메운 청중들에게 계속 말을 건넸다. “이 산티아고라는 양반이…”라고 하면서, 제3의 시각에서 상황을 바라보았고, 산티아고를 칭송하는 “역시 산티아고”라는 자진모리장단의 노래를 할 때는, 청중에게 직접 장단을 설명하면서 연습까지 시켰다.

이러한 가운데 이자람의 ‘유머코드’가 빛났다. 다랑어를 잡아 회를 쳐서 먹는 산티아고의 모습을 그리며 “이 양반은 옛날 쿠바 양반이라 간장과 와사비는 모를 것이다”, 지쳐서 잠이 오는 순간에 “침대가 그리우면 지는 거다”라고 노래해 청중을 박장대소하게 했다.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등 이분법적 사고가 점차 허물어지고 있는 글로벌 시대에 음악인들은 많은 고민을 하며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찾고 있다. 이러한 시기, 이자람의 시도가 주목받는 점은 전통적 판소리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연주력을 토대로, 자신의 독자적인 예술관을 투영시켜 작품을 선보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양의 문학작품을 한국적으로 각색하거나 한국적 상황에 접목하는 점도 독창적일 뿐 아니라, 판소리의 창에 심취해 있는 청중에게 시각을 달리해서 그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브레히트식 서사기법을 적용한 점도 탁월했다. 더욱이 그 긴 시간을 목이 터져라 부르는 열정은 청중을 깊이 감동하게 해 이자람 팬덤을 형성하게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왜 이번에는 ‘노인과 바다’였을까. 궁금했는데, 공연을 보면서 답을 찾았다.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심연의 바다에서 펼쳐지는 물고기들의 생생한 움직임, 난관 속에서도 불굴의 의지를 보이는 인간의 내면이 판소리의 생생함으로 구현될 가능성을 찾았기 때문일 것이다. 미니멀하게 활용된 조명이 무대를 푸르른 밤바다로 만들어내면서 그 효과는 더욱 극대화되었다. 한국 전통 판소리가 가진 ‘이야기 풀어내기, 시대를 바라보는 시각을 담기, 한판 신나게 놀아보기’라는 특성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이 공연은 헤밍웨이의 마음도 사로잡았을 것 같다.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