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감방 살 판…최악 코인 사기범 몰락한 '파마머리 천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미국 암호화폐 거래소 FTX 창업자 샘 뱅크먼-프리드. 12일 바하마 당국은 뱅크먼-프리드를 체포했다. 로이터=연합뉴스

미국 암호화폐 거래소 FTX 창업자 샘 뱅크먼-프리드. 12일 바하마 당국은 뱅크먼-프리드를 체포했다. 로이터=연합뉴스

파마 머리에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를 즐겨 입는 ‘인간미 있는 젊은 천재’. 세계 3대 암호화폐 거래소 FTX 창업자인 샘 뱅크먼-프리드를 수식했던 말이다. 하지만 이런 표현은 더는 통용되지 않는 분위기다. 지난달 FTX의 파산 신청 이후 가려졌던 민낯이 드러나면서 그는 이제 ‘코인판 리먼 브러더스 사태’를 야기한 대형 경제사건의 한 주인공으로 그려지고 있다.

FTX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FTX 본사가 있는 바하마에서 사실상 은거해 왔던 뱅크먼-프리드가 12일(현지시간) 현지에서 전격 체포됐다. 이날 뉴욕타임스(NYT)와 BBC 등에 따르면 바하마 당국은 뱅크먼-프리드를 체포했으며 이는 미국이 그에 대한 범죄 혐의를 통지한 데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라이언 핀더 바하마 법무장관은 성명을 통해 "미국이 그의 송환 요구를 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필립 데이비스 바하마 총리는 "미국 수사와 함께 바하마도 FTX 붕괴에 대한 자체 수사를 계속할 것"이라고 했다.

FTX의 갑작스러운 파산을 수사해 온 데미안 윌리엄스 뉴욕 남부지검 검사는 이날 "뱅크먼-프리드가 기소된 상태"라며 13일 공소장을 통해 자세한 사항을 공개할 것이라고 했다. NYT는 익명의 관계자를 인용해 뱅크먼-프리드가 전신 사기(인터넷·온라인을 통한 사기), 전신 사기 공모, 증권사기 공모와 자금 세탁 등의 혐의를 받고 있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뱅크먼-프리드의 사기 등 혐의가 인정될 경우 최장 종신형이 선고될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했다. 그러나 그는 지난달 NYT에 "사기를 치려고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FTX의 몰락은 지난달 2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뱅크먼-프리드가 운영하는 헤지펀드 알라메다 리서치의 재정이 불안한 상태이고 알라메다의 운영이 FTX의 코인에 의존하고 있다'는 내용의 온라인 문서가 유출된 날이다. 이후 3일 만에 60억 달러(약 7조8000억원)가 인출되는 등 뱅크런이 발생했다. 뱅크먼-프리드는 80억 달러(약 10조5000억원) 규모의 긴급 자금조달을 시도했지만 무위에 그치자 결국 지난달 11일 법원에 파산보호 신청을 했다.

미 사법 당국과 증권거래위원회(SEC),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는 뱅크먼-프리드가 고객 돈을 빼내 위험 투자를 전문으로 하는 알라메다에 10조원이 넘는 자금을 지원하면서 FTX의 유동성 위기를 야기했는지 여부를 집중 조사 중이다.

NYT에 따르면, 뱅크먼-프리드가 받는 혐의 중엔 지난 5월 발생한 2개의 암호화폐 붕괴 연루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2개의 암호화폐는 한국산 코인 테라와 루나를 말한다. 사법 당국은 FTX 측이 갑작스럽게 테라 코인을 대량 매도해 테라 사태를 촉발한 게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앞서 NYT는 암호화폐 관계자를 인용해 테라 대량 매도 주문이 FTX의 자회사인 알라메다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대한민국 국적의 권도형씨가 설립한 블록체인 기업 테라폼랩스는 지난 5월 테라 가격 대폭락 이후 수만 명의 투자자에게 막대한 손해를 입혔다.

미 프로농구팀 마이애미 히트의 경기장, 마이애미 FTX 아레나 입구에 있는 FTX 로고. AP=연합뉴스

미 프로농구팀 마이애미 히트의 경기장, 마이애미 FTX 아레나 입구에 있는 FTX 로고. AP=연합뉴스

FTX의 방만한 경영은 파산 신청 후 새로 부임한 존 레이 FTX CEO를 통해서도 드러나는 중이다. 그는 FTX의 고객 자산이 뱅크먼-프리드가 운영하는 알라메다의 자산과 섞여 혼탁하게 운영됐다고 비판했다. 레이 CEO는 미 하원 청문회를 앞두고 제출한 답변서에서 FTX 붕괴를 두고 "경험이 부족하고 세련되지 않은 소수에 의해 기업 통제가 집중된 데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어 "내 경력에서 재무제표와 내부 통제, 지배구조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문에서 이런 기업 통제의 완전한 실패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과거 회계 부정으로 무너진 엔론의 청산 과정을 맡았던 구조조정 전문 기업인이다.

뱅크먼-프리드는 13일 미 의회 청문회에서 화상으로 증언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12일 체포로 참석 여부가 불확실해졌다고 외신은 전했다. 바하마 당국에 따르면 그는 13일 예심 법원에 출두할 예정이다. 맥신 워터스 미국 하원 금융서비스위원장은 "뱅크먼-프리드의 해명을 직접 들을 기회가 사라져 아쉽다"며 "청문회는 계획대로 열 것"이라고 말했다.

바하마는 미국과 범죄인 인도 조약을 맺고 있지만 피고인이 이의를 제기할 경우 실제 인도는 수주 또는 그 이상의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NYT는 전했다.

실리콘밸리에서 나고 자란 뱅크먼-프리드는 MIT 졸업 후 월스트리트의 투자은행에서 트레이더로 일했다. 이후 2019년 구글 출신 게리 왕과 FTX를 설립했다. 한때 FTX의 하루 거래액이 100억달러(약 13조원)에 달할 정도로 성장하자 미 투자업계는 그를 JP모건 창업자인 존 피어폰트 모건이나 월가의 전설적인 투자자 워런 버핏에 빗대기도 했다.

미 정계에서도 큰손이었다. 지난해 포브스가 선정한 400대 부자 순위에 든 뱅크먼-프리드는 '크립토 달링(Crypto Darling)'이란 애칭이 생겼을 정도로 미 정치권에 막대한 후원금을 뿌렸다. 미 시민단체 책임정치센터에 따르면 뱅크먼-프리드가 올해 워싱턴 정가에 뿌린 돈은 약 3884만 달러(약 517억원)에 이른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