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년 그놈 뒤쫓았다...美, 270명 희생 '팬암기 테러' 끝내 심판

1988년 12월 리비아의 테러 공격으로 팬암기가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폭발해 승객과 승무원 259명이 숨졌다. 항공기 잔해가 마을에 떨어져 지상에서도 11명이 사망했다. AP=연합뉴스

미국 정부가 1988년 스코틀랜드 상공에서 폭발해 미국인 등 270명의 목숨을 앗아간 '팬암기 폭파 사건' 피의자의 신병을 확보했다. 미국과 영국 수사 당국의 끈질긴 수사로 34년 만에 테러 용의자를 미국 법정에 세우게 됐다.

미국 법무부는 11일(현지시간) 팬암기 폭파에 사용된 폭탄을 제조한 혐의로 아부 아길라 모하마드 마수드를 구금하고 있다고 밝혔다고 로이터통신이 전했다. 법무부 대변인은 마수드가 워싱턴에 있는 연방 법원에서 열리는 재판에 출석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스코틀랜드 검찰청 대변인도 이날 마수드가 미국에 구금됐다고 확인하면서 "스코틀랜드 검찰과 경찰은 마수드와 같이 범행에 가담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영국 및 미국 정부와 협력해 계속 수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미국 팬어메리칸(팬암)항공 103편은 1988년 12월 21일 영국 런던에서 미국 뉴욕으로 향하던 중 이륙 38분 만에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폭발했다. 보잉 747 항공기에 탔던 승객과 승무원 259명 전원이 숨졌다. 이 가운데 약 190명이 미국인이었다. 항공기 잔해가 주택가로 떨어지면서 지상에서도 11명이 사망했다. 잔해와 파편은 이 지역 2175㎢에 걸쳐 발견됐다. 이 사건은 영국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테러로 기록됐다.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때인 2020년 마수드를 팬암기 폭탄 테러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혐의로 기소한다고 발표했다. 그로부터 2년 뒤 바이든 행정부가 마수드의 신병을 확보한 것인데, 그가 어떤 경로로 미국으로 인도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영국 가디언이 전했다.

BBC방송은 지난달 마수드가 리비아 교도소에 수감 중 민병대에 납치됐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그가 재판을 받기 위해 미국 당국에 넘겨질 것이라는 추측이 제기됐다고 보도했다.

지금까지 팬암기 폭파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리비아 공작원 압델바세트 알리 알 메그라히 한 명이다. 메그라히는 2001년 네덜란드에 특별 설치된 스코틀랜드 법정에서 종신형을 받고 수감됐다가 2009년 암 진단을 받고 석방된 뒤 2012년 리비아에서 숨졌다.

메그라히 재판은 곡절 끝에 성사됐다. 1991년 미국과 영국 수사당국은 메그라히를 포함해 2명을 기소했지만, 99년이 되어서야 리비아 정부로부터 신병을 넘겨받을 수 있었다.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중재로 네덜란드에 설치한 스코틀랜드 법정에서 재판받는 조건이었다. 이 재판에서 다른 공작원 라멘칼리파 피마는 무죄를 선고받았고, 검찰은 메그라히에게 공범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계속했다.

미국이 마수드 신병을 확보하면서 팬암기 폭파 사건 34년 만에 두 번째 재판이 열리게 됐다. 이번에는 스코틀랜드가 아닌 미국 법에 따른 재판으로 진행되며, 그 결과는 예단할 수 없다고 BBC가 전했다. 마수드는 다른 사건으로 리비아 감옥에 수감 중에 팬암기 폭파에 관여했다고 자백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자백이 인권 유린이 자행되는 군벌 운영 감옥에서 이뤄진 것이어서 증거 능력이 쟁점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 검찰은 마수드가 팬암기 폭파 사건 당시 몰타에서 다른 2명과 만났고, 미리 준비된 가방을 비행기에 실으라는 지시를 받았으며, 가방 속 폭발물 타이머를 맞춰 비행기를 폭발시켰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가디언이 전했다. 마수드는 사건 3개월 뒤 리비아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를 만나 "위대한 국가적 과업"을 완수한 데 대한 치하의 말을 들었다고 미국 검찰은 주장한다. 카다피는 2003년 서방과 화해 무드 속에서 경제 제재를 완화하는 대가로 팬암기 폭파에 대한 책임을 인정했다.

워싱턴=박현영 특파원 park.hyunyou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