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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m 갔다 43초만에 온 운전자…'초등생 사망' 뺑소니 쟁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사람을 친 뒤 사고 현장에서 21m 벗어났다가 43초 만에 돌아온 운전자에게 도주 의사가 있었다고 볼 수 있을까. 지난 2일 서울 청담동 언북초등학교 후문에서 발생한 어린이 사망사고에 경찰이 ‘뺑소니’(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상 도주치사)혐의를 피의자에게 뒤늦게 적용해 검찰에 넘기면서 불거진 논쟁이다. ‘21m’와 ‘43초’는 향후 수사와 재판에서도 피의자 A씨의 도주의사 인정여부를 둘러싼 쟁점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피해자가 사망한 ‘뺑소니’ 범죄의 법정형은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으로 살인죄와 같다.

 지난 7일 언북초 후문 피해자(9) 추모 공간. 지난 2일 이 부근에서 언북초등학교 학생이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채혜선 기자

지난 7일 언북초 후문 피해자(9) 추모 공간. 지난 2일 이 부근에서 언북초등학교 학생이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채혜선 기자

뒤늦게 뺑소니 혐의 적용 이유는

11일 경찰 등에 따르면 서울 강남경찰서가 언북초등학교 후문 부근 어린이 보호구역(스쿨존)에서 초등학생을 치어 숨지게 한 30대 A씨에 대해 지난 4일 구속영장을 신청할 땐 특가법상 어린이 보호구역 치사·위험운전치사, 도로교통법상 음주운전 혐의 등 3가지 혐의를 적용했다.

A씨가 사고 지점에서 21m 떨어진 본인 집 주차장에 차량을 주차한 뒤 43초 만에 현장에 돌아와 가해자임을 밝히고, 주변에 신고 요청을 한 내용 등을 감안할 때 도주라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특정법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5조의3(도주차량 운전자의 가중처벌)

① 「도로교통법」 제2조에 규정된 자동차ㆍ원동기장치자전거의 교통으로 인하여 「형법」 제268조의 죄를 범한 해당 차량의 운전자(이하 “사고운전자”라 한다)가 피해자를 구호(救護)하는 등 「도로교통법」 제54조제1항에 따른 조치를 하지 아니하고 도주한 경우에는 다음 각 호의 구분에 따라 가중처벌한다.

1. 피해자를 사망에 이르게 하고 도주하거나, 도주 후에 피해자가 사망한 경우에는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2. 피해자를 상해에 이르게 한 경우에는 1년 이상의 유기징역 또는 500만원 이상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그러나 지난 9일 A씨를 검찰에 송치할 땐 경찰은 도주치사 혐의를 추가했다. 유족들의 강력한 반발이 있은 뒤에 나온 선택이다. 경찰 관계자는 “‘현장 상황에 따라 조치가 적절히 강구돼야 한다’는 도로교통법을 참고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사건의 외부 법률자문단인 김신 변호사(서울지방변호사회 대변인)는 “충격이 발생했을 때 운전자가 이를 인지한 정황이 발견됐고 차량을 얼마간이라도 진행했기 때문에 뒤늦게 뺑소니 혐의가 추가됐다”고 설명했다.

스쿨존 만취운전 후 43초 이탈…뺑소니 될까

음주운전을 하다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에서 초등생을 치어 숨지게 한 혐의를 받는 30대 남성 A씨가 9일 오전 서울 강남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고 있다.  경찰은 당초 A씨에게 '특정범죄가중처벌'상 어린이보호구역치사·위험운전치사·음주운전 혐의만 적용했지만, 도주치사(뺑소니) 혐의를 인정해 추가 적용했다. 뉴스1

음주운전을 하다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에서 초등생을 치어 숨지게 한 혐의를 받는 30대 남성 A씨가 9일 오전 서울 강남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고 있다. 경찰은 당초 A씨에게 '특정범죄가중처벌'상 어린이보호구역치사·위험운전치사·음주운전 혐의만 적용했지만, 도주치사(뺑소니) 혐의를 인정해 추가 적용했다. 뉴스1

판례상 ‘도주’란 “사고 운전자가 사고로 인해 피해자가 사상을 인식했음에도 피해자를 구호하는 등 의무 이행 전 사고현장을 이탈해 사고를 낸 자가 누구인지 확정될 수 없는 상태를 초래하는 경우”(대법원 2012도1474)를 뜻한다.

이에 따라 경찰은 교통사고 등 관련 수사 때 사고 발생 시 즉시 정차 등을 규정한 도로교통법 제54조1항이나 대법원 판례 등을 참조해 사고 차량이 ▶즉시 정차했는지 ▶구호 조치를 했는지 ▶피해자에게 인적사항을 제공했는지 ▶경찰·소방에 신고했는지 등을 살펴 뺑소니인지를 판단한다고 한다. 수사 경력 25년이 넘은 한 경찰 수사관은 “도주치사란 사고 발생을 인식하고도 구호 조치 없이 도주한다는 고의가 있어야 성립되는 범죄”라고 말했다.

과거 유사 사건 재판에선 어떤 객관적인 정황이 있었을 때 도주의사가 있다고 볼 것인지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전개돼 왔다. 2013년 대법원은 횡단보도를 건너던 행인을 친 뒤 현장을 7분 정도 벗어났다가 돌아와 경찰에 자진하여 신고하고 피해자를 병원에 옮겼더라도 뺑소니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당시 2심은 피고인이 사고 후 현장으로부터 약 200m만 이탈한 점 등을 근거로 뺑소니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를 대법원이 뒤집은 것이다. 이탈 거리가 30m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유죄가 선고된 경우도 있다. 반면 사고 후 전화통화를 위해 10여분 동안 사고현장을 떠났다 돌아온 경우나 피해자로부터의 구타를 피하기 위해 차량을 방치한 채 현장을 떠났다가 30분 후에 돌아온 경우는 도주를 인정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에서도 21m를 벗어난 데 불가피한 이유가 있었는지, 이탈 이전에 어떤 조치를 시도했는지 등이 관건이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형사 전문 조신영 변호사(법률사무소 약속)는 “피해자 생명은 분 단위가 아닌 초 단위의 적절한 조치가 생과 사를 가르게 된다”며 “사고 직후 가해자가 차량을 이동시킨 거리와 사고 장소를 이탈한 뒤 복귀한 시간이 짧아 첨예한 공방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형사 전문 정윤 변호사(법률사무소 이든)는 “이번 사건에서 가해자가 짧은 시간 안에 다시 현장에 돌아와 스스로 구호 조치 등을 취했기 때문에 도주 의사가 없음을 강하게 주장한다면 뺑소니 혐의 처벌이 쉽지 않을 수 있다”고 짚었다. 검사 출신 이동헌 변호사(법무법인 이룸)는 “사고 지점에서 50m를 넘게 벗어났다면 도주했다가 복귀한 거로 통상 볼 텐데 21m라면 주차 뒤 피해자 상태를 살폈을 가능성이 있다”며 “주차 이유 등 사고 후 운전자 행동을 면밀히 살펴 고의성을 입증해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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