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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정호의 시시각각

옹기집 막내아들의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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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2019년 김수환 추기경 선종 10주기를 맞아 명동성당에서 열린 추모 사진전. [뉴스1]

2019년 김수환 추기경 선종 10주기를 맞아 명동성당에서 열린 추모 사진전. [뉴스1]

1969년 5월 21일 명동성당 사제관에 캐딜락 하나가 나타났다. 그해 3월 말 47세에 세계 최연소 추기경에 오른 김수환(1922~2009) 추기경에게 보낸 선물이었다. 당시 이효상 국회의장과 가톨릭 신자 몇몇이 추기경의 품위를 생각해 성의를 모았다고 한다.

김수환 추기경 탄생 100주년 행사
서로 무거운 짐 져주는 세상 소망
윤 정부 ‘약자와의 동행’ 이뤄낼까

 며칠 뒤 승용차에 동승한 수녀 한 명이 웃으며 말했다. “추기경님, 고급 차를 타고 다니시면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도 안 들리고 고약한 냄새도 안 나겠네요.” 그 순간 김 추기경은 뒤통수를 맞은 듯했다. 그날 저녁 무릎을 꿇고 ‘귀족’ 모습을 한 자신을 통렬히 반성했다. 그리고 바로 캐딜락을 돌려보냈다.
 지난 3일 서울 혜화동 가톨릭대에서 열린 ‘김수환 추기경의 생애·영성 연구’ 심포지엄에서 들은 에피소드다. 2022년 김 추기경 탄생 100년을 맞아 진행된 일련의 행사를 마무리하는 자리였다. 물론 김 추기경이 이후 승용차 없이 지낸 건 아니다. 서울대교구장 사임(1998년) 전까지 운전면허증을 따겠다고 벼르고 별러온 그였지만 결국 공약(空約)에 그치고 말았다.
 김 추기경의 회고록에서 재미난 대목과 마주쳤다. “가장 가깝게 지내는 사람은?”이라는 기자의 질문에 추기경은 “30년 가까이 내 발이 돼준 운전기사 김형태(요한) 형제. 성실하고 운전 잘하고 마음씨가 곱다”고 대답했다. 일생을 낮은 사람들과 함께하려 했던 김 추기경의 인간미를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널리 알려진 대로 김 추기경은 옹기장수 집안 출신이다. 회고록 1장도 ‘가난한 옹기장수의 막내아들’로 시작한다. 그는 5남 3녀의 막내였다. 아버지는 옹기를 팔아 가족을 살폈고, 어머니도 옹기·포목 행상을 하며 아이들을 키웠다. 김 추기경은 ‘옹기’ 두 글자를 혼자 마음에 간직한 호(號)로 삼기도 했다. 생전에 “옹기 특유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좋아한다. 부모님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되살려준다”고 말했다.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왼쪽) 포스터와 드라마의 원작이 된 웹소설. [사진 JTBC, 네이버 시리즈 캡처]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왼쪽) 포스터와 드라마의 원작이 된 웹소설. [사진 JTBC, 네이버 시리즈 캡처]

 김 추기경은 천생 낙관적이었나 보다. 셋방살이를 전전한 빈한한 환경 속에서도 “우리 집은 왜 이렇게 가난한가” “다른 집 애들은 점심을 먹는데 나는 왜 굶어야 하는가”를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요즘 시청률 20%에 다가서며 인기몰이 중인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의 살풍경과 대비된다. 쌀통마저 텅텅 빈 집안의 한 젊은이가 국내 굴지의 대기업 막냇손자로 환생해 처절한 복수를 펼쳐 나가는 판타지 드라마가 되레 더욱 현실적이다.
 “신부가 된 것이 가장 잘한 일”이라는 김 추기경은 또 다른 삶을 동경한 적이 없었을까. 누구나 한 번쯤 품는 ‘2회차 인생’ 말이다. 김 추기경의 대답이 역시 그답다. “결혼해서 처자식과 오순도순 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봤다. 저녁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시골 오두막집, 얼마나 정겨운 풍경인가. 코흘리개 시절 꿈은 읍내에 점포를 차려 돈을 버는 것이었다. 그런데 장사하지 않기를 잘했다. 나 같은 사람은 허구한 날 사기를 당해 알거지 되기 십상이다.”
 앞서 언급한 심포지엄의 타이틀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였다. 신약 ‘갈라디아서’ 6장 2절에서 따왔다. 이 땅의 민주화와 인간화라는 큰 짐을 짊어져 온 김 추기경의 생애를 압축한 것 같다. 여기서 알맹이는 ‘서로’다. 공존·공생·협력·소통이다. 김 추기경 또한 홀로 이룬 것은 하나도 없을 터다.
 이날 ‘김수환 추기경의 사회영성과 한국사회의 변화’를 발표한 한승훈 건국대 교수의 말이다. “김 추기경을 ‘한국 민주화의 정신적 지주’ ‘한국 사회의 큰 어른’으로 단순히 기억하면 안 된다. 그가 설계했던 민주주의 사회를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빈부·세대 격차, 불신·분열의 사회에 대한 처방전으로 그리스도인의 형제애를 역설해 온 김 추기경의 참뜻을 새기자는 제안이다. 코로나19로 사회 양극화가 더 깊어진 지금, ‘약자와의 동행’을 거듭 약속한 윤석열 정부의 실천 방안을 주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