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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광형의 퍼스펙티브

‘마이크로 학위’의 기적…4개월 만에 반도체 전문가 키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4면

국가 성패 가를 과학기술 인력

이광형 KAIST 총장, 리셋 코리아 4차산업혁명분과장

이광형 KAIST 총장, 리셋 코리아 4차산업혁명분과장

지난 11월 25일 오후였다. 62명의 수료생에게 ‘마이크로 학위’를 주며 눈을 맞추어 물었다. “힘들지 않았냐?” 모두 밝은 웃음으로 “재미있었다”고 답했다. 모두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이날처럼 보람 있는 날도 드물었다. 4개월간의 반도체 설계 교육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수료증을 받게 된 학생들이었다. 4개월 전만 해도 길을 잃고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고민하던 젊은이들이었다. 매년 수천 명의 졸업생에게 총장이 일일이 악수하며 졸업장을 수여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날은 달랐다.

대학 졸업 후 특별한 소속 없이 지내던 젊은이들이 KAIST 반도체설계교육센터(IDEC)가 개설한 반도체설계교육 프로그램에 지원했다. 4개월 만에 반도체 설계 인력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다니 꿈 같은 말이었다. 40명 모집에 전국에서 320명이 모여 8대 1의 경쟁이었다. 예상 밖의 뜨거운 호응이었다.

카이스트 반도체설계과정, 2년 과정을 4개월에 압축해 가르쳐
수료자들은 반도체 기업 등에 취업해 전문 인력으로 활약해
미·중 패권 경쟁 시대, 국가의 성패는 우수 인력 확보에 달려
우수 연구인력 집중 지원하고 마이크로 학위로 산업인력 키워야

학교는 학생들의 열의를 생각해 수용 인원을 최대로 늘려 80명을 선발했다. 합격자들은 전자·전산 계열 대학 졸업자들이 많았지만 인문계 졸업자도 있었다. 수업은 일주일에 5일간 매일 6시간씩 강행군이었다. 석사과정 2년 동안 배우는 이론과 실습 내용을 4개월에 압축하여 배웠다.

8대 1의 경쟁 뚫고 입학

퍼스펙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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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에는 KAIST 교수뿐 아니라 전국 대학의 반도체 전공 교수와 기업체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교육 장소는 화성시가 동탄역 롯데백화점 지하에 마련해주고, 실습 장비와 교육비는 산업통상자원부가 지원해주었다. 또 37개 반도체 설계회사가 컨소시엄 형태로 참여하여 학생들에게 현장 실무를 소개해 줬다. KAIST는 성실하게 공부를 마치고 시험에 합격한 학생들에게 마이크로 학위를 수여했다. 1기 입학생 80명 중에 62명이 모든 과정을 통과하여 학위증을 받게 됐다.

4개월 만에 어떻게 반도체 설계 교육을 다 마칠 수 있느냐는 의문은 기우였다. 반신반의하던 반도체 회사들이 학생들의 실습 실력을 보자, 사원으로 뽑아가기 위해 접근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수료식 날에는 거의 모든 학생이 회사와 취업 절차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런 소문이 나자 새해 1월부터 시작하는 2기에는 지원자가 더 많아졌다. 전국에서 530명이 지원하여 담당 교수진을 고민에 빠뜨리고 있다. 최대 수용 인원이 80명밖에 안 돼 나머지 450명에게 실망을 안겨주어야 한다. 배우려는 열망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급하게 실습시설을 늘려야 하는데, 쉬운 일이 아니다.

길을 잃은 젊은이들에게 새 길을 찾아주는 감동적인 스토리는 또 있다. KAIST SW교육센터는 2021년부터 소프트웨어 앱 교육을 하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SW중심대학사업의 지원으로 시작된 이 교육과정은 16주 동안 일반인을 대상으로 컴퓨터 소프트웨어와 앱 응용을 가르친다. 더 나아가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창업까지 할 수 있게 도와준다. 입학생들의 대학 전공은 인문계를 포함하여 다양하다.

이 교육과정에는 지금까지 191명이 참여했고, 대부분의 수료생이 실력을 인정받아 취업하게 됐다. 그중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43건의 크고 작은 창업이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창업 성과로는 소형 공동주택 관리회사가 있다. 이 회사는 20억원의 초기 투자를 받고 12명의 직원이 공동주택의 효율적인 운영을 도와주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있다. 이들은 교육을 받기 전에만 해도 무엇이 자신에게 적합한 일인지 고민하던 사람들이었다.

과학기술은 국가 안보의 핵심 요소

우리 사회는 ‘구직란’과 ‘구인란’이 동시에 심각하다. 일자리가 없어서 놀고 있는 사람이 많다. 특히 청년 실업자는 지금도 30만 명을 웃돌고 있다. 이와 반대로 기업들은 사람을 구하지 못해서 구인란에 허덕이고 있다. 전공과 일자리가 일치하지 않아서 나타나는 미스매치 현상이다. 대학의 학과별 정원 조정이 시대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를 보완하는 방법이 앞서 소개한 마이크로 학위제도라 생각한다. 대학 본연의 임무는 아니지만, 사회에 대한 봉사활동으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정부는 최근 12대 국가 전략기술을 발표했다. 기술 패권 경쟁이 치열해지고 기술이 국가 안보에 직결되는 시대를 맞이하여, 핵심 기술을 골라서 집중적으로 개발하기 위함이다. 기존에는 과학기술은 국가 경제의 원천이 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많았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과학기술은 국가 안보의 핵심 요소로 떠올랐다. 기술이 있어야 경제력을 증강할 수 있고, 경제력이 있어야 군사력과 외교력을 확대하여 국가의 생존을 담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12개의 전략기술은 크게 3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혁신 선도, 미래 도전, 필수 기반 유형이 그것들이다. 혁신 선도 유형에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2차전지, 첨단모빌리티, 차세대 원자력 기술이 있다. 미래 도전 유형은 첨단바이오, 우주항공해양, 수소, 사이버보안 기술이다. 필수 기반 유형에는 인공지능, 차세대통신, 첨단로봇, 양자 기술이 있다.

연구 인력과 산업 인력 둘 다 중요

우리가 선택한 전략 기술들은 경쟁국들도 집중하고 있는 기술이다. 또 우리 형편상 모든 기술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확보하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고, 동맹국과 기술 협력도 필요하다. 현재의 국제정치 지형은 미국과 중국의 대립으로 블록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동맹국들 사이의 협력이 중요하다. 과학기술 외교와 협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국제간 공동 연구, 공동 사업화, 공동 특허 출원 등으로 협력 관계를 공고하게 할 필요가 있다. 이러기 위해서는 정부가 연구비 배분 시에 국내로 제한해서는 안 된다. 이제 국내외를 불문하고 우리가 원하는 기술을 개발해줄 연구팀을 찾아 지원해야 한다.

기술 경쟁에는 우수 인력 확보가 핵심이다. 지난 10월 20차 중국 공산당 대회에서 시진핑 주석이 90분 동안 발표한 보고서에서 우수 인재 확보를 가장 강조하고 있다. 같은 달 발표한 미국 바이든 정부의 국가전략보고서(NSS)에서도 우수 인재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내세우고 있다. 이처럼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의 성패는 우수 인재 확보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정부가 제시한 12대 국가 전략기술의 성패도 인력 양성과 확보에 성패가 달려 있다고 보인다. 따라서 필자는 인력 양성에 세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고급 연구 인력을 양성해야 한다. 우수한 대학 연구실에 연구비를 지원하여 석사 박사 과정 학생들이 첨단연구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우수 연구 인력을 확보하기 위한 파격적인 유인책도 필요하다.

둘째, 많은 산업 인력을 육성해야 한다. 첨단 기술을 연구하지는 않지만, 산업 현장에서 일할 수 있는 인력을 대량으로 길러야 한다. 대학 졸업자를 몇 개월간 추가 교육하는 마이크로 학위제도도 효율적이라 생각한다. 앞서 소개한 사례를 참고하여 다른 대학들도 관심을 가져 주면 좋겠다. 개인이나 기관도 사회에 봉사해야 하는데, 길 잃은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만큼 보람 있는 봉사는 없을 것이다.

이공계 외국인 유학생 이민 확대해야

셋째, 우수 외국인 유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미국이 계속 성장하는 큰 동력 중 하나가 외국 유학생을 받아들여서 정착시키는 방법이다. 우리나라도 이제 인구 감소로 인해 기술 인력 부족이 더 심화할 것이다. 이민 정책에서는 미국을 따라 하면 된다. 각 대학이 이공계 외국인 유학생을 많이 받아들이고, 석·박사 학위를 받은 우수 인력에는 영주권과 국적을 부여하면 된다. 외국인 대량 유입에 따른 사회 갈등을 우려하는 견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비교적 성실하고 두뇌가 좋다. 우리가 조금만 도와주면 대한민국 사회에 공헌하는 좋은 우리 국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4개월 반도체 설계 교육을 받고 자신감으로 환하게 웃는 62명의 얼굴을 잊지 못한다. 부존자원이 거의 전무한 대한민국이 여기까지 온 데에는 뜨거운 교육열이 주효했다. 아직도 우리의 가슴 속에는 배움에 대한 열망이 뜨겁다. 이러한 열정이 있는 한 대한민국의 장래는 밝다고 생각한다. 8대 1의 경쟁으로 배움을 찾는 젊은이들에게 정부와 대학들은 응답해야 할 것이다.

이광형 KAIST 총장, 리셋 코리아 4차산업혁명분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