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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능이 머금은 세월의 깊이…하고픈 말 많아 고뇌했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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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에서 만난 제41회 중앙시조대상 수상자 정혜숙(65) 시인은 "이제야 정말 시조 쓰는 사람으로 인정 받은 기분이다. 엄청난 무게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난 6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에서 만난 제41회 중앙시조대상 수상자 정혜숙(65) 시인은 "이제야 정말 시조 쓰는 사람으로 인정 받은 기분이다. 엄청난 무게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국내 시조문학상 가운데 최고 권위로 꼽히는 중앙시조대상 제41회 수상작에 정혜숙(65) 시인의 ‘릉의 후원을 걸었다’가 선정됐다. 중앙시조신인상에는 박화남(55) 시인의 ‘맨발에게’가 뽑혔다. 등단 무대인 제33회 중앙신춘시조상은 김현장(58)씨의 ‘마리오네트’에게 돌아갔다.

‘릉의 후원을 걸었다’로 제41회 중앙시조대상 정혜숙 시인

중앙시조대상은 2000년 이후 등단한 시인 가운데 등단한 지 15년 이상이 됐고, 시조집을 한 권 이상 펴냈으며 한 해 5편 이상을 발표한 이가 후보 자격을 갖는다. 중앙시조신인상은 등단 5년 이상 10년 미만이며, 한 해 5편 이상을 발표한 시조 시인이 후보다. 중앙신춘시조상은 올해 1월부터 11월까지 매달 열린 중앙시조백일장 입상자들로부터 새 작품을 받아, 그중 최고작을 가리는 연말장원 성격이다.

대상의 영예를 안게 된 정혜숙 시인은 “너무 높게만 보여 꿈도 꾸지 못했던 상이 내게 너무 빨리 왔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정 시인은 2003년 중앙신인문학상 시조 부문으로 등단하고 2012년 중앙시조신인상을 수상한 데 이어 10년 만에 대상까지 품에 안게 됐다. 지난 6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 사옥에서 만난 정 시인은 “이렇게 3관왕을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제 인생을 바꿔준 중앙일보에 정말 감사하다”며 “시조를 쓰는 20여 년 동안 수상 소식에 울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만큼 중앙시조대상은 시조 시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영광스러운 상”이라고 했다.

전남 화순에서 태어난 정 시인은 어릴 적 어머니를 도와 밭일을 하면서도 “꼭 문학으로 성공해 사립문에 ‘정혜숙 생가’라 써 붙이고 싶다”고 다짐할 정도로 문학에 열의가 깊었다. 시골이라 읽을거리가 궁한 와중에도 화장실에 놓인 신문 쪼가리나 ‘소년 007’ 만화 등 눈에 보이는 활자를 닥치는 대로 읽었다. “내성적인 성격이라 친구들과 즐겁게 어울려 놀지는 못했다. 대신 책을 좋아해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거나 도서관에 파묻혀 살았다.”

학교 졸업 후 취업과 결혼이란 현실을 먼저 쫓아야 했지만, 문학의 꿈을 한 번도 잊은 적은 없었다. 결국 40대에 접어들어 늦깎이로 입학한 방송대 국문과에서 시조에 눈을 떴다. “처음엔 자유시를 썼는데, 시조 쓰시는 교수님이 제 (시의) 걸음걸이가 너무 시조와 닮았다며 시조를 권했다. 나도 모르게 시조의 걸음걸이가 내 안에 들어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여전히 자유시에서 창작의 영감을 얻곤 한다는 정 시인은, 그럼에도 정형시인 시조가 “훨씬 매력적”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시조는 단정하다. 내가 말이 없어서인지 말이 많은 시보다는 단정함 속에 여운을 즐길 수 있는 시조를 쓰는 게 좋다. 말을 잘라내고 다듬어서 틀에 맞추는 과정이 참 좋다. 그런 점에서 나는 천생 시조 시인이라 느낀다”고 했다.

나무, 숲, 새와 같은 자연을 좋아한다는 그의 당선작 ‘릉의 후원을 걸었다’는 어느 가을, 김해 수로왕릉에 다녀온 경험을 떠올려 쓴 작품이다. “산수유 열매 빨갛게 익어가던 즈음, 잠시 들린 후원의 능이 유독 둥글고 완만했다. 파릇파릇한 잔디들이 자란 그곳에서 느낀 세월의 깊이와 망한 왕조의 쓸쓸함, 고즈넉함을 담고 싶었다.” 시조의 시간적 깊이를 순식간에 확장하는 종장은 오랜 고민 끝에 써 내려 간 것이었다. “정말 할 말이 많은데, 차마 다 담을 수 없어 그렇게 마무리했다”고 소개했다.

“비틀거리며 20년을 왔다”고 자신의 시조 인생을 요약한 정 시인은 중앙시조대상 수상에 대해 환희는 짧은 대신, 그 무게는 “바윗덩이가 가슴에 얹힌 듯” 무겁다고 했다. “저는 여전히 거북이처럼 쓸 때마다 난산이다. 항상 내 작품에 만족하지 못하고 회의감에 비틀거렸지만, 이제 대상을 받았으니 눈을 뜨나 감으나 오로지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 매진할 것이다. 세상살이 너무 각박하고 건조하지 않나. 그 틈바구니에서 제 작품이 조금이라도 마음을 건드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제41회 중앙시조대상과 신인상의 예심은 시조 시인 김영란·김보람씨가, 본심은 시조 시인 염창권·박명숙씨와 문학평론가 황치복씨가 맡았다. 중앙신춘시조상은 김삼환·서숙희·강현덕·손영희 시인이 심사했다. 세 부문의 시상식은 16일 오후 5시 서울 중앙일보(마포구 상암산로 48-6) 21층에서 열린다.

릉의 후원을 걸었다
-정혜숙


무의탁 구름 사이로 밀랍 같은 낮달이다
방금 닿은 전언처럼 가지 끝 붉은 열매
나무의 쓸쓸한 화법
그 너머를 더듬는다

흰피톨의 햇살이 가락국에 내리고
시간이 겹겹 쌓인 릉의 후원은 고요했다
바람이 다정했으며
새들의 악보 산뜻했다

아주 멀리 다녀왔으나 글을 이룰 수 없으니
여백으로 남겨둔다, 잠시 펜을 놓는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천 년이 또 흘러간다

◆정혜숙

2003년 중앙신인문학상 등단. 시집 『앵남리 삽화』, 『흰 그늘 아래』, 『거긴 여기서 멀다』 외. 시조시학 젊은시인상(2008년), 중앙시조대상 신인상(2012년), 무등시조문학상(2020년) 수상 외.

역사와 자연에 대한 심오한 사유와 그윽한 정취

중앙시조대상·신인상 심사평  

제41회 중앙시조대상 심사대상 작품은 예심위원들의 선고를 거쳐 올라온 17명 시인의 90여 편이었다. 대상 작품들이 한결같이 절차탁마의 과정을 거쳐 졸이고 달이는 시조의 함축적 미학과 유장하고 정제된 가락을 실현하고 있어서 심사위원들은 숙고를 거듭하면서 행복한 비명을 질러야 했다. 심사위원들이 끝까지 고심한 작품들은 박희정, 이송희, 이태순, 정경화, 정혜숙 시인의 가편들이었는데, 자연과 역사와 인간에 대해 넓고 그윽한 사유와 정취를 담아낸 정혜숙 시인의 ‘릉의 후원을 걸었다’를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정혜숙 시인의 수상작은 속도전에 휩쓸리는 현대의 독자들을 갑자기 시간이 정지한 듯한 능의 후원으로 초대하는데, 거기에는 시간과 공간, 역사의 자연, 인간과 문명, 삶과 죽음, 그리고 의미와 무의미 같은 근원적인 질문들이 들끓고 있다. 특별한 비유나 수사에 의존하지도 않고 아무런 기교도 없는 듯한 자연스러운 시조의 보법으로 그러한 사유와 정취를 실현하고 있어서 놀라웠다. 시조라는 시적 공간이 얼마나 넓어지고 깊어질 수 있는지를 시험하고 있는 이 작품에 대해서 심사위원들은 올 한해 시조단이 거둔 가작으로 내세워도 손색이 없다고 판단했다. 다원적인 상징의 깊이를 통해서 마지막까지 겨룬 이송희 시인의 ‘배꼽의 둘레’ 또한 심사위원들은 아쉬움에 한참을 붙들고 있었다. 이송희 시인 또한 우리 시조단의 미래라는 것을 확인했다는 점을 밝혀둔다.

신인상 역시 각축이 심했는데, 시조의 내용과 형식을 갱신하기 위한 다양한 실험과 도전 의식이 돋보였다. 심사위원들이 끝까지 주목한 시인들은 박화남, 이명숙, 인은주 시인들이었는데, 결국 심사위원들은 우리 사회의 그늘진 곳을 대상으로, 현대인의 삶의 신산함과 그 속에 깃든 그윽한 삶의 정취를 탐색한 박화남 시인의 ‘맨발에게’를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박화남 시인의 수상작은 ‘손’과 ‘발’의 대비라든가 ‘바닥’의 상징성을 바탕으로 삶의 깊이를 타진하고 있으며 삶의 엄정함과 구도의 정신까지 함축하고 있다. ‘맨발’의 상징성은 그동안 시인이 보여줬던 ‘맨몸’의 이미지와 묵언의 심미적 효과를 통해서 현대인이 처한 곤경과 적막을 응축해 온 시정신의 연장선에서 현대인의 내밀한 고통과 고독, 그것들을 온몸으로 삭히고 발효시켜 삶의 어떤 궁극에 도달하려는 정신의 극점을 보여준다. 끝까지 망설이게 했던 인은주 시인의 ‘동거의 의미’, '염소와 함께’ 같은 작품들은 인은주 시인이 시조단의 새로운 기풍을 선도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심사위원=염창권·박명숙·황치복(대표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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