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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에 인맥까지 갖춘 ‘中 전문가’…만주에서 온 독립운동가 후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이동빈(41) 경위는 올해 초부터 해양경찰청 국제협력과 국제법규정보팀 소속으로 일하고 있다. 국제정보수집분석생산 및 배포, 해외주재관 정보관리, 국내외 정보기관 헙력, 업무국제해양법에 관한 자문 지원이 그의 일이다. 사진 이동빈 경위

이동빈(41) 경위는 올해 초부터 해양경찰청 국제협력과 국제법규정보팀 소속으로 일하고 있다. 국제정보수집분석생산 및 배포, 해외주재관 정보관리, 국내외 정보기관 헙력, 업무국제해양법에 관한 자문 지원이 그의 일이다. 사진 이동빈 경위

“갑자기 해역에 중국어선이 많아졌는데…”
지난 1월 말 이동빈(41) 경위의 전화기가 울렸다. 해양경찰청 종합상황실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상황실 근무자는 이 경위에게 “최근 북위 35도 서해 한중잠정조치수역(한국과 중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해역)에 중국어선이 많이 나타난다. 그 이유를 파악해달라”고 했다. 통상 중국어선은 춘절(중국의 가장 큰 명절로 음력 정월 초하룻날) 전후엔 대부분 조업하지 않는다. 입항 후 휴식이 관례다. 그런데 춘절 연휴 기간, 쌍타망(어선 2척이 긴 자루 형태 그물을 함께 끌어 조업하는 방식) 어선 50~60척이 한중잠정조치수역에서 지속해서 포착됐다고 한다.

이 경위는 즉각 파악에 나섰다. 그가 중국 소식통을 통해 확인한 정보는 이랬다. 중국 정부는 지난해부터 소형항구 어선 입출항 단속정책을 실시했다. 입출항이 까다로워지면서 영세어선 사이에선 “한번 나간 김에 장기간 조업을 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됐다고 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격리 조치가 엄격해지고 5월 초부터 휴어기 단속이 강화된다는 소식도 한몫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산둥성의 상당수 어선이 춘절 연휴에도 조업에 나선 것이었다. 이 경위의 보고 덕에 해경은 신속히 상황을 파악하고 대응책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경위는 “한국에 오기 전 중국에서 취미로 무술을 익혔는데 그때 동료들이 중국 곳곳에 있다. 중국 내 탄탄한 인맥과 중국어가 업무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며 웃었다.

‘독립운동’ 외증조부 유언 따라 택한 한국행

국제정보 수집분석, 국내외 정보기관 협력. 해경청 국제협력과 국제법규정보팀 소속인 이 경위의 업무다. 2019년 최우수 외사첩보요원 상을 받는 등 중국 전문가로 통하는 그지만 처음부터 이 일은 꿈꾼 건 아니라고 했다. 지금 고인이 된 이 경위의 외증조부 이기일 선생은 1920년대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 운동가였다. 광복을 보지 못하고 타지에서 눈을 감은 이 선생은 “조국이 강해야 한다. 광복이 되면 꼭 고국으로 돌아가 나라를 지키는 일을 해달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외할아버지와 어머니를 통해 전해진 선조의 유언은 톈진 외국어대를 졸업한 뒤 진로를 고민하던 대학생 이동빈을 한국으로 이끌었다.

이동빈(41)경위는 과거 제주자치경찰단 기마경찰대에서 근무했다. 무술 실력 등을 인정받아 배치됐다고 한다. 사진 이동빈 경위

이동빈(41)경위는 과거 제주자치경찰단 기마경찰대에서 근무했다. 무술 실력 등을 인정받아 배치됐다고 한다. 사진 이동빈 경위

2009년 귀화해 제주도에 정착했지만 한국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고 한다. 중국에서 딴 학위를 인정해주는 직장은 드물었다. 생계를 위해 공사장 등에 뛰어들었다. 그러면서도 공부는 놓지 않았던 그는 2011년 외국어 특채로 제주자치경찰이 됐다. 번듯한 직업이 생겼지만 아쉬움이 남았다. 장기인 외국어를 살려 더 큰 역할을 해보고 싶었다. 다시 경찰간부 후보생 시험에 도전했고 2016년 새내기 경찰 간부가 됐다. 7개월 뒤 정부조직법 개정으로 해양경찰청이 부활하자 해경으로의 전출을 택했다. 중국어선 단속 등 외국어를 활용할 기회가 많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동빈 경위는 2018년 부산 해경 소속 3001함정에서 1년간 근무했다. 사진 이동빈 경위

이동빈 경위는 2018년 부산 해경 소속 3001함정에서 1년간 근무했다. 사진 이동빈 경위

남해청 국제범죄수사대와 부산 해경 남항파출소를 거치며 수많은 외국인을 만났다. 범죄자가 많았지만, 이 경위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외국인이 기억에 남았다고 했다. 언어·문화 장벽 탓에 수사기관에 쉽게 도움을 청하지 못하는 이주 노동자들이 마음에 걸렸다. 이 경위는 이들을 위해 법적 자문을 하는 한편 법무부의 사회통합프로그램에 멘토로 참석해 한국 정착 노하우를 전했다. 2018년 법무부는 이 경위의 공로를 인정해 제1호 모범 귀화자로 선정했다. 올해 초 국제법규정보팀으로 발령받은 뒤에도 이 경위는 이주 외국인을 위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법무부는 2018년 국적법 제정 70주년을 기념해 이 경위 등 4명을 1호 모범귀화자로 선정했다. 사진 법무부

법무부는 2018년 국적법 제정 70주년을 기념해 이 경위 등 4명을 1호 모범귀화자로 선정했다. 사진 법무부

최근 이 경위는 중국 정부가 추진하는 해상 부유식 원자력 발전소와 해상 위성 발사선 건설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국내 해상 안보와 환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인 만큼 현지 동향을 파악하는 데 주력하는 것이다. 수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느라 눈코 뜰 새 없지만, 그는 이 일을 택한 게 후회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 경위는 “중국 외교 안보전문가로 성장하겠다는 꿈이 있다”며 “한국에서 생활하는 이주 외국인에게 노력만 한다면 나라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주역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 경위는 2012년 월간문학지 ‘모던포엠’에서 시 부문 신인작품상을 받아 등단한 시인이다. 최근엔 바빠서 시를 잘 쓰지 못한다고 했다.사진은 2011년 이 경위가 쓴 시. 사진 이동빈 경위

이 경위는 2012년 월간문학지 ‘모던포엠’에서 시 부문 신인작품상을 받아 등단한 시인이다. 최근엔 바빠서 시를 잘 쓰지 못한다고 했다.사진은 2011년 이 경위가 쓴 시. 사진 이동빈 경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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