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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사람의 민낯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17호 20면

인간 이하

인간 이하

인간 이하
데이비드 리빙스턴 스미스 지음
김재경·장영재 옮김
웨일북

교만의 요새
마사 너스바움 지음
박선아 옮김
민음사

토머스 제퍼슨이 작성한 미국 독립선언서는 지금 봐도 혁명적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됐다”며 생명·인권·자유·행복의 가치를 강조한다. 서구가 근대로 이행하면서 제시된 수많은 합리주의 사상이 녹아있다. 하지만 미국 뉴잉글랜드대 철학 교수로 비인간화·인종·거짓선동을 연구해왔고 이 책 『인간 이하』(원제 Less Than Human)를 쓴 지은이는 “여기서 말한 인간의 범주에는 정확하게 누가 포함되는가?”라고 도발적으로 질문한다. 제퍼슨은 물론 조지 워싱턴 등 미국 독립전쟁 지도자 대부분이 흑인 노예를 거느린 농장주였기 때문이다.

토머스 제퍼슨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미국 버지니아 대학교 교정. 미국 제3대 대통령 제퍼슨은 이 대학 창립자이기도 하다. [AP=연합뉴스]

토머스 제퍼슨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미국 버지니아 대학교 교정. 미국 제3대 대통령 제퍼슨은 이 대학 창립자이기도 하다. [AP=연합뉴스]

당시 서구에선 계몽주의 지식인도 흑인을 ‘어딘가 열등한 종족’으로 여기며 인간의 범위에 유색인종을 제외했다. 인간을 납치해 사고팔며 강제 노동을 시키고 심지어 살해하기도 하는 야만이 이런 비인간화를 통해 합리화됐다. 이 책은 인간을 편견의 눈으로 바라보며 차별하고 폭력적이고 잔혹하게 대우하는 비인간화의 뿌리를 파고든다.

지은이는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2001년 이래 로켓 공격과 전투기 폭격이 수시로 발생해온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와 이스라엘부터 살핀다. 서로를 인간이 아니라 이슬람과 유대교에서 부정한 동물로 보는 개나 다름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해결 가능성은 희박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비인간화는 유대인과 집시, 슬라브인 등을 계획적으로 학살한 나치의 홀로코스트에서도 똑같이 적용됐다. 나치는 이들을 ‘운터멘셴’, 즉 하등 인간으로 간주했으며 위험한 질병을 옮기는 쥐나 기생충, 또는 사악한 맹수로 악마화했다. 나치가 죽음의 수용소를 짓고 종족 절멸을 시도할 수 있었던 수단이 바로 비인간화였다.

교만의 요새

교만의 요새

상대를 인간으로 치지 않은 건 소련군 선전물도 마찬가지였다. “독일인을 학살하라. 그것이 당신의 노모가 두 손 모아 소망하는 일이다. 당신의 자녀가 간절히 바라는 일이다. 고토 러시아가 부르짖는 일이다. 머뭇거리지 마라. 마음 약해지지 말라. 죽여라.” 독일인을 그야말로 ‘전쟁기술을 연마한 두 발 달린 짐승’이거나 모조리 척살해야 할 혐오스러운 ‘짝퉁 인간’으로 간주했다.

프로파간다를 반복한 결과 붉은 군대가 가장 먼저 진격한 독일 땅 동프로이센에선 잔혹극이 벌어졌다. 보고서는 말한다. “하룻밤 사이에 여성 72명과 남성 한 명이 죽었다. 여성 대다수는 강간당했으며, 가장 나이 많은 여성은 84세였다. 일부 피해자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

군국주의 일본은 태평양전쟁 중 미국인과 영국인을 기치쿠(鬼畜·귀신과 짐승이라는 뜻)로 부르며 뿔 달린 괴물로 묘사했다. 일본군은 중국인을 벌레나 짐승 같다는 뜻이 담긴 ‘찬코로’로 불렀다.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차별과 혐오 교육을 받은 결과다. 일본 군인들이 난징 대학살 등에서 비무장 민간인을 아무렇지 않게 살해한 배경일 수 있다는 게 지은이의 지적이다.

연합군도 일본군을 ‘잽스’라는 속어로 부르며 원숭이·침팬지·쥐로 묘사했다. 이런 차별과 혐오는 전후에도 이어졌다. 1994년 르완다 대학살과 95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스레브레니차 학살 때도 비인간화가 벌어졌다.

지은이는 비인간화가 상대를 인간 이하로 둔갑시키는 ‘대상화’ 과정을 통해 이뤄진다고 설명한다. 어떤 사회적 수단에 의해 사고파는 노예나 쾌락을 위한 성적 대상 등이 되면 인간성을 상실하고 사물로 취급되면서 차별과 공격을 당하게 된단 얘기다. 인간 이하로 인식하게 되면 상당수 경우 폭력과 모욕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폭력적인 본능은 인간 진화의 산물일 수도 있고, 후천적인 이유일 수도 있다. 유럽이 신대륙과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현지 주민을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은 것이 인종차별과 잔혹 행위를 증폭시킨 한 원인이 됐을 가능성도 있다.

이런 행동은 오늘날에도 상대를 타자화하면서 적개심을 부추기는 일부 정치인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학교나 직장·조직 등에서 이뤄지는 ‘왕따’나 괴롭힘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지은이는 비인간화의 충동을 줄이기 위해서는 더 많은 과학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교만의 열쇠』(원제 Citadels of Pride)는 미투 운동 등으로 여성과 남성 모두가 혁명적 시기를 맞고 있는 현재의 젠더 격동 상황에서 비인간화의 문제를 꼬집는다. 미국 시카고대 로스쿨과 철학과의 법학·윤리학 석좌교수인 지은이는 대학·스포츠계·예술계·정치계 등에서 만연한 성폭력의 원인을 권력 남용을 일삼으며 법을 악용해 자신을 보호하는 교만한 사람들에서 찾는다. 여성을 단순한 객체로 다루는 대상화 속에서 평등한 존중이나 온전한 자율성이 부정당하면서 교만이라는 악이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학살과 집단 간 증오와 정치적 혐오는 물론 젠더 폭력까지 문제의 근원은 비인간화였다. 모두가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면 밝은 유토피아가 열릴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어두운 디스토피아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두 책의 지은이는 나란히 웅변한다. 인류사적 비극을 해결하려면 다양한 학제간 연구와 사회적 노력이 절실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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