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술에 관대한 음주공화국] 코로나로 혼술·홈술 급증, 일상 되찾자 회식까지 부활…살인·폭력 4건 중 1건 취중 범행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817호 12면

SPECIAL REPORT

티빙(TVING) 드라마 ‘술꾼도시여자들’에서 주량 대결을 벌이고 있는 장면. [사진 티빙 유튜브]

티빙(TVING) 드라마 ‘술꾼도시여자들’에서 주량 대결을 벌이고 있는 장면. [사진 티빙 유튜브]

“현실적으로 술을 마시지 않고 직장생활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술 강권은 많이 사라졌지만 한 번에 마시지 않고 술잔에 술을 남기면 핀잔을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객사 접대, 협력사 응대 등 업무를 원활하게 하는 데 있어서 술이 필수라고 생각하는 분위기도 지배적이고요.”

제조업체 근무 14년차 직장인 정모(39)씨는 체내 알콜 분해 효소가 부족해 술을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진다. 술을 자주 마시면 심혈관질환에 걸릴 확률이 높고 숙취도 심하지만 그는 오늘도 마지못해 술을 들이킨다. 코로나19가 완화되며 다시 회식이 시작됐는데, 직장에서 남자 직원의 비음주를 허용하는 분위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직장에선 회식에서 술을 많이 마셔도 다음날 거뜬하게 일찍 출근하는 게 미덕이다. 회식뿐만 아니라 업무에 있어서도 술이 필수다. 이미 주량을 넘어선 음주로 구토에 위염을 앓은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특히 연말엔 술자리가 더 잦아 두렵다.

관련기사

음주문화가 개선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음주는 사회생활을 위한 기본 요건으로 여겨진다. 회식뿐만 아니라 지인과의 만남에서도 술이 빠지지 않는 탓에 사회생활을 하며 술을 안 마시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커피를 안 마시는 건 그러려니 넘어가도, 술을 안 마시면 어떤 이유에서 안 마시는지 부연 설명을 해야 한다. 4년전 건강을 위해 금주를 결심한 직장인 장모(50)씨는 “술을 끊고 나서 비음주자를 별종으로 생각하고, 술 끊은 사람은 독종으로 보는 사회적 시선을 체감하고 있다”며 “아직까지도 ‘같이 마시자’ ‘어떻게 술을 좋아했던 사람이 이럴 수 있냐’는 말을 듣는다”고 말했다.

집에서 술 마시는 비율 코로나 전의 두 배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과도한 음주는 신체질환을 야기하고 통제력을 잃게 한다. 술을 단순 기호식품이 아닌 약물로 보는 게 바람직한 이유다. 살인(28.5%), 성폭력(26.3%), 폭력(26.3%) 등 강력범죄의 상당수도 주취상태에서 발생했다. 자살과도 무관하지 않다. 김성완 전남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자살자의 40%는 혈중에 알코올이 나오고, 서울에서 고위험 음주 대상자가 많은 자치구일수록 자살률이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고위험 음주 대상자는 주2회 이상 남자는 7잔, 여자는 5잔 이상의 술을 마시는 경우에 해당한다. 예상보다 기준이 낮아 놀랐는가. 이미 국민의 14.1%가 고위험 음주 대상자다.

그럼에도 각종 만남에서 술이 빠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술을 매개로 맺는 관계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며 집단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고, 술자리는 신뢰와 친밀함의 상징이다. 이택광 문화평론가(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한국의 문화가 많이 다양화됐고 다채로워졌다고 하지만 그 중심에 술이 있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며 “음주를 당연시하는 문화는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코로나19를 거치면서 개인주의가 강화돼 회식 등 집단문화는 약화됐지만 여전히 술자리에서 더 깊은 얘기를 털어놓고, 중대한 의사결정을 하고, 정보를 교환하는 경향은 남아있다”고 설명했다.

음주 미화하는 취중진담 포맷 방송 봇물

실제로 코로나19 이후 직장 내 회식이 줄었지만 술자리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술을 혼자 마시는 ‘혼술’과 집에서 마시는 ‘홈술’은 증가했다. 만취할 때까지 마시거나 강권하는 사례가 점차 줄어듦에 따라 술 출고량은 줄고 있지만, 술 문화는 여전히 만연한 셈이다. 총 주요 주류 출고량은 2015년 375만 7786㎘(킬로리터)에서 2020년 330만 4754㎘로 5년 새 12% 감소했다. 반면 지난해 온라인상의 ‘혼술’ 언급량은 2만6445건으로 전년 대비 68.5%, ‘홈술’은 79.2% 증가했다. 대부분 ‘좋다’ ‘맛있다’ ‘추천’ 등 긍정적인 언어와 함께 표현됐다. 단계적 일상회복 이후 집에서 술을 마시는 비율은 49%로 코로나19 이전(25.2%)보다 두 배로 늘었다.

술을 기저에 둔 문화 탓에 우리나라는 술에 유독 더 관대하다. 이는 음주로 인한 범죄를 가볍게 보는 시각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지난 2008년 8세 여아를 납치·성폭행하고 신체를 훼손한 조두순은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일관된 진술 끝에 ‘술에 취한 심신미약 상태’가 인정된 결과였다. 이후 유기징역 상한은 15년에서 30년으로, 심신미약 감경규정도 ‘강행’에서 ‘임의’로 바뀌었다. 과도한 음주상태에서 범죄를 저지를 경우 심신미약을 인정해 처벌 수준을 낮추는 ‘주취감경’ 폐지 여론이 대두되며 이후 아동 성범죄에 한해 주취감경이 배제됐다. 현재 다른 범죄에 있어서도 술에 의한 심신미약은 더 이상 인정되지 않는 추세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하지만 판결문에 명시되지 않을 뿐 일선에 있는 변호사들은 같은 범죄여도 음주 상태에서 발생한 범죄에 대해 양형이 관대함을 느끼고 있다. 이은의 변호사는 “피해자와 피의자가 함께 술을 마신 이후 발생한 준강간의 경우 재판을 하는 과정이나 양형에 있어서 일반 강간 사건보다 사법부가 더 너그럽게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사기 등 자본과 관련된 범죄에서는 음주를 감안하지 않으면서 사회적 약자가 피해자인 주취범죄에 대해 관대한 것은 만연한 음주 문화 때문”이라며 “주취감경은 폐지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신민영 변호사(법무법인 호암) 역시 “판결문엔 없지만 음주를 감안한 양형임이 느껴질 때가 있다”고 말했다.

음주운전 재범률도 45%에 달한다. 지난해 음주운전 단속에 적발된 운전자 11만5882명 중 5만1960명이 2회 이상 재범자였다. 이미 한 번 적발된 전력이 있으면서도 ‘안 걸리면 그만’이라는 마음으로 대수롭지 않게 또다시 운전대를 잡은 셈이다. 음주운전은 비단 본인뿐만 아니라 제삼자를 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지난해 음주운전으로 인한 교통사고는 1만4894건 발생했고, 사상자는 2만3859명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연예인 자숙 사례만 봐도 음주운전이 대다수다. 유상용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윤창호법으로 규제가 강화됐지만 음주운전 재범 비율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며 “지속적인 음주단속뿐만 아니라 음주시동잠금장치 등 시스템적으로 사전에 음주운전 자체를 차단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온라인 음주 콘텐트 규제 논의 필요”

지난 18일 서울 동대문구의 한 도로에서 경찰관들이 음주단속을 하고 있다. [뉴시스]

지난 18일 서울 동대문구의 한 도로에서 경찰관들이 음주단속을 하고 있다. [뉴시스]

최근 음주는 방송 콘텐트 소재로도 당당히 활용된다. 지난해 인기를 끈 티빙(TVING) 드라마 ‘술꾼도시여자들’이 대표적이다. 이 드라마는 제목에 충실하게 주인공들이 만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고,  주량을 과시하는 등 다수의 음주 장면을 연출했다. 예능에서도 출연자가 술을 마시는 술방이 유행이다. tvN 예능 ‘내 어깨를 봐 탈골됐잖아’와 ‘인생술집’, IHQ 예능 ‘마시는 녀석들’ 등 최근 들어 19세 이상 관람 불가를 내걸고 취중 토크를 나누는 예능 프로그램이 많아졌다. 높은 주량이 곧 자랑인 것처럼, 술을 마셔야만 진솔한 얘기가 가능한 것처럼 비춰질 소지가 있어 우려된다.

특히 청소년의 술방 시청이 문제다. 시청 연령을 제한하고, 오후 10시 이후에 편성해도 방송사가 온라인에 클립 영상을 올리는 탓에 청소년이 술방을 접하는 건 시간문제다. 유튜브·틱톡에도 술방 콘텐트가 우후죽순 등장하고 있다. 최근 가장 주목 받았던 유튜브 채널 중 하나인 ‘차린건 쥐뿔도 없지만’은 방송인 이영지가 유명 게스트와 함께 취중진담을 나누는 포맷이었다. 방탄소년단 진을 포함해 다수의 아이돌 가수가 출연하며 수백만, 수천만 조회수를 기록했다. 뿐만 아니라 KBS 엔터테인먼트 채널 웹예능 ‘조세호의 와인바’, CJ ENM 더 밥 스튜디오의 ‘낮술의 기하핰’, 카카오TV 예능 소유기의 ‘노상어게인’ 등 술을 소재로 한 콘텐트가 쏟아진다.

술방은 청소년에게 음주를 미화하는 부정적 효과를 야기한다. 이동귀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치킨을 먹는 장면을 보면 치킨이 먹고 싶어지는 것처럼 청소년이 음주 장면에 많이 노출될 수록 ‘술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 있고, 따라할 가능성도 높다”고 말했다. 이미 청소년 음주 경험률은 32.9%, 음주 시작 연령은 13.2세를 기록했다. 미디어에서 음주장면을 많이 접할수록 음주에 대한 긍정적 기대를 갖게 된다는 연구 결과도 발표됐다. 연구에 참여한 나세연 한국건강증진개발원 음주폐해예방팀장은 “국민들은 폭음 등을 점차 지양하고 있는 가운데 오히려 미디어가 음주를 더 멋있는 것으로, 친목을 도모하는 데 꼭 필요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며 비판했다.

김헌식 대중문화 평론가 역시 “마약 떡볶이, 마약 김밥이라는 명칭을 통해 마약에 대해 둔감해져 마약이 더 확산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는 것처럼, 디지털 콘텐트가 음주에 둔감하게 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우려스럽다”며 “본방 위주의 규제에서 벗어나 온라인 콘텐트를 어떻게 규제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고, 양적인 평가뿐만 아니라 힘든 일이 있을 때 술로 푸는 장면, 음주를 자랑하는 장면 등 음주를 조장하는 내용 또한 규제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