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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의 저주'를 말기암 펠레가 끊을까…브라질 운명의 3경기 [후후월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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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후월드]는 세계적 이슈가 되는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을 파헤쳐 보는 중앙일보 국제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

“펠레에게 우승 트로피 바치겠다.”

브라질 선수들이 6일 카타르 도하 974 스타디움에서 열린 카타르월드컵 16강전 한국과 경기에서 4-1 승리한 후, 투병 중인 펠레의 쾌유를 기원하는 현수막을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브라질 선수들이 6일 카타르 도하 974 스타디움에서 열린 카타르월드컵 16강전 한국과 경기에서 4-1 승리한 후, 투병 중인 펠레의 쾌유를 기원하는 현수막을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브라질 축구대표팀 에이스 네이마르가 지난 6일(한국시간) 2022 카타르월드컵 16강전에서 한국을 4-1로 누른 후, ‘펠레(Pelé)’라고 적힌 커다란 현수막을 펼치며 이렇게 말했다. 네이마르가 힘주어 말한 이름은 ‘축구 황제’ 펠레(82)였다.

브라질 팬들이 지난 5일 카타르월드컵 16강전 브라질과 한국의 경기에서 브라질 축구스타 펠레가 그려진 현수막을 들고 있다. AFP=연합뉴스

브라질 팬들이 지난 5일 카타르월드컵 16강전 브라질과 한국의 경기에서 브라질 축구스타 펠레가 그려진 현수막을 들고 있다. AFP=연합뉴스

브라질이 낳은 세계적인 축구 스타 펠레는 월드컵 때마다 각종 매체에 얼굴을 드러내는데, 이번 대회에선 두문불출하고 있다. 대신 브라질 선수들의 인터뷰와 브라질 팬들의 응원 현수막 등에서 등장하고 있다. 카타르 수도 도하의 빌딩 전체에 펠레 얼굴이 도배되기도 했다.

지난 3일 카타르 수도 오하의 300m 높이의 고층 호텔 '토치 타워'에 펠레의 사진과 함께 쾌유를 비는 메시지가 전시되어 있다. AP=연합뉴스

지난 3일 카타르 수도 오하의 300m 높이의 고층 호텔 '토치 타워'에 펠레의 사진과 함께 쾌유를 비는 메시지가 전시되어 있다. AP=연합뉴스

대장암 말기, 병원에서 월드컵 시청 

펠레는 지난해 9월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이다. 종양 제거 수술 후 화학 요법 치료를 받았지만, 심부전증과 전신 부종 그리고 정신 착란 등 합병증이 찾아왔다. 그래서 이번 카타르월드컵이 펠레에겐 생애 마지막이 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펠레가 지난 2021년 9월 브라질 상파울루의 한 병원에 입원한 모습. 사진 펠레 인스타그램 캡처

펠레가 지난 2021년 9월 브라질 상파울루의 한 병원에 입원한 모습. 사진 펠레 인스타그램 캡처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펠레는 지난달 29일 병원에 다시 입원했다. 화학 요법 대신 ‘완화 치료’를 받기 위해서다. 완화 치료는 심각한 말기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를 위한 고통 완화 단계다. 다만 펠레의 가족들은 지난 4일 "코로나19 감염으로 호흡기 상태가 악화해 입원한 것으로 위독한 상황은 아니다"고 했다. 병원 측도 "펠레는 의식이 있는 안정적인 상태로 새로운 합병증은 없다"고 발표했다.

이날 펠레도 팔로워가 1000만명이 넘는 소셜미디어(SNS)에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평소처럼 치료를 받고 있다"며 "병원에서 월드컵 경기를 보며 브라질을 응원하고 있다"고 했다.

양말 공 차던 소년, 월드컵 3번 우승

펠레는 1940년 10월 23일 브라질 최대도시 상파울루에서 북동쪽으로 300㎞로 떨어진 트레스코라송스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에드손 아란테스 도 나시멘토다. 어린 시절 그가 살던 동네 클럽팀에 ‘빌레’라는 명 골키퍼가 있었는데, 어린 나시멘토는 발음이 잘 안 돼 ‘펠레’라고 외쳤다. 그 후 펠레는 나시멘토의 별명이 됐고, 어느새 그의 이름이 됐다.

펠레(왼쪽), 그의 어머니 셀레스트(가운데)와 아버지 돈지뉴. 사진 펠레 인스타그램 캡처

펠레(왼쪽), 그의 어머니 셀레스트(가운데)와 아버지 돈지뉴. 사진 펠레 인스타그램 캡처

펠레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무명의 축구선수였다. 생활고에 시달린 어머니는 그가 축구하는 것을 싫어했지만, 아버지를 닮은 펠레는 공부에 담을 쌓고 축구에 흠뻑 빠졌다. 풍족하지 못한 그는 양말을 뭉쳐 만든 공을 맨발로 찼다. 아버지에게 기본기를 배웠는데 일취월장했다. 키 1m73㎝·몸무게 73㎏이었던 펠레는 정확한 패스, 현란한 드리블, 뛰어난 골 결정력 등을 겸비한 완벽한 선수로 성장했다.

1955년 만 15세에 브라질에서 가장 유명한 축구팀 산투스에 입단했고, 이듬해 37골을 넣어 데뷔 첫해 득점왕에 올랐다. 1957년 17세에 국가대표가 된 후 1958년 스웨덴월드컵에서 6골을 넣으며 우승을 이끌었다. 펠레는 1962년 칠레, 1966년 잉글랜드, 1970년 멕시코 대회까지 4번의 월드컵에 참가해 14경기에서 12골을 터뜨렸고, 우승 트로피 ‘줄리메컵’을 3번이나 들어 올렸다.

브라질 축구스타 펠레(맨 왼쪽)가 지난 1958년 6월 29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스웨덴월드컵 결승전에서 스웨덴에 5-2로 승리한 후, 동료들과 함께 기뻐하고 있다. 당시 그는 만 17세였다. AP=연합뉴스

브라질 축구스타 펠레(맨 왼쪽)가 지난 1958년 6월 29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스웨덴월드컵 결승전에서 스웨덴에 5-2로 승리한 후, 동료들과 함께 기뻐하고 있다. 당시 그는 만 17세였다. AP=연합뉴스

펠레에 따르면 그는 1977년 37세에 은퇴할 때까지 1283골을 넣어 역대 최다 득점자다. 다만 친선경기 득점 등이 포함됐고 오래된 기록인지라 정확성이 떨어져 논란이 되고 있다. 소속팀과 대표팀에서 작성한 공식 경기 득점 기록은 757골이다.

어쨌든 그가 대단한 축구선수였음은 틀림없다. 영국 선데이 타임스는 "펠레를 어떻게 쓰지? 바로 G-O-D(신)이다"라는 헤드라인을 달기도 했다. 펠레는 올림픽에 출전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20세기 최고의 선수로 펠레를 뽑았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전쟁 멈추게 했지만…정치 이용당해

펠레는 경기장 밖에서 ‘평화 대사’로 활동했다. 1969년 펠레는 소속팀 산투스를 따라 내전 중인 나이지리아를 방문해 나이지리아 대표팀과 친선경기를 가졌다. 당시 펠레를 보기 위해 수많은 나이지리아인을 경기장을 찾았고, 이로 인해 내전도 잠시 중단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펠레는 CNN과 인터뷰에서 "나이지리아 사람들은 축구를 열렬히 사랑했고, 우리가 뛰는 것을 보기 위해 전쟁을 멈췄다"면서 "무척 자랑스러운 일화"라고 했다.

펠레는 지난 6월 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 전쟁을 멈춰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푸틴 대통령과 2017년 모스크바에서 만난 사연을 소개하며 "그때 웃으며 오래 악수하던 바로 그 당신의 손에 이 상황을 중단시킬 힘이 있다"고 강조했다.

 브라질 축구 팬이 지난 2일 카타르월드컵 조별리그 브라질과 카메룬 경기 관중석에 등장한 펠레 모습이 담긴 현수막 위로 월드컵 복제 트로피를 들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브라질 축구 팬이 지난 2일 카타르월드컵 조별리그 브라질과 카메룬 경기 관중석에 등장한 펠레 모습이 담긴 현수막 위로 월드컵 복제 트로피를 들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명성이 자자한 펠레지만 세계 최고 리그가 즐비한 유럽에서 뛴 적은 없다. 펠레가 1958년 월드컵에서 혜성으로 떠오르면서 스페인 명문 레알 마드리드 등 유명 클럽에서 펠레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그러자 브라질 정부는 1961년 펠레를 ‘국보’로 지정해 국외로 나가는 것을 금지했다. 산투스 구단이 펠레를 유럽 구단에 보내서 얻는 수익보다 상품화해 얻는 이익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는 시각도 있다. 펠레는 은퇴 시기가 가까워진 35세에 미국 프로축구 뉴욕 코스모스 팀에 간 게 유일한 해외경험이다.

브라질 독재정권 시절에는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기도 했다. BBC는 "브라질의 폭력적인 군사독재 정권(1964~1985년)은 펠레를 이용해 자신들의 오명을 세탁했다"면서 "1970년 월드컵을 앞두고 국제적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대표팀 스태프를 군인들로 구성해 우승하도록 압박했다"고 전했다.

이후 1985년 브라질이 민주화를 이루고 직접선거가 치러지자 펠레의 대선 출마설이 돌기도 했다. 그도 "출마만 하면 당선은 문제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펠레는 대통령 대신 1995년 체육부 장관이 됐다. 또 유엔 환경 관련 친선대사, 유네스코 친선대사 등을 맡는 등 인도적 활동에 매진했다.

친자확인 소송 등 시끄러운 사생활 

펠레는 축구선수 시절엔 막대한 부를 쌓지는 못했다. 빅리그에서 뛰지 않아, 선수 생활을 하며 번 돈은 총 600만 달러(약 79억원) 정도로 추산된다.

은퇴 후엔 달랐다. 유명인사 자산공개 사이트로 알려진 셀리브리티 넷 워스(Celebrity Net Worth)에 따르면 펠레는 은퇴 이후 광고모델, 영화 출연, 각종 홍보대사, 자서전 저술, 축구 관련 사업 등으로 자산을 1억 달러(약 1322억원)로 불렸다. 그래도 21세기에 등장한 리오넬 메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4억~6억 달러(5000억~8000억원)를 벌어들인 것에 비하면 작다.

'축구 황제' 펠레(오른쪽)가 지난 8월 말 3번째 부인인 일본계 브라질인 마르시아 시벨리 아오키와 함께 건강한 모습을 알렸다. 사진 펠레 인스타그램 캡처

'축구 황제' 펠레(오른쪽)가 지난 8월 말 3번째 부인인 일본계 브라질인 마르시아 시벨리 아오키와 함께 건강한 모습을 알렸다. 사진 펠레 인스타그램 캡처

펠레의 가족관계와 사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공식적으로 3번 결혼했고 자녀가 7명이 있다. 하지만 혼외 자식이 많아 그의 핏줄이 총 몇 명인지 알 수 없을 정도라고 영국 일간지 더선이 전했다. 가정부 사이에서 태어난 딸은 1996년 친자확인 소송 끝에 펠레의 딸로 밝혀졌지만, 펠레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많은 여성이 내 방문을 두드렸다"며 "솔직히 여러 명과 관계를 맺었고 몇몇은 아이를 낳았다고 하는데 나도 나중에야 알았다"고 고백했다. 2016년 일본계 브라질인 마르시아 시벨리 아오키(56)와 결혼한 후엔 가정에 충실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지막 소망, 브라질 6번째 우승 

펠레가 지난 2014년 3월 9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행사 중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바라보고 있다. AFP=연합뉴스

펠레가 지난 2014년 3월 9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행사 중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바라보고 있다. AFP=연합뉴스

한 시대를 풍미한 펠레의 마지막 소망은 브라질이 월드컵에서 통산 6번째로 우승하는 것이다. 브라질은 펠레 시절 3번 우승한 후, 1994년 미국, 2002년 한·일 대회에서 2번 더 줄리메컵을 가져갔다. 이후 20년 동안 없었다.

펠레는 지난달 말 "우리가 해피엔딩을 맞을 거라고 확신한다"며 선수들에게 "우승 트로피를 집으로 가져와!"라고 했다. 네이마르, 히샬리송 등 브라질 선수들도 휴대전화 배경화면을 줄리메컵 사진으로 바꿀 정도로 우승에 간절함을 보인다.

그러나 ‘펠레의 저주’가 있다. 그간 월드컵 역사에서 펠레가 "우승할 것"이라고 점찍은 팀은 번번이 탈락했다는 징크스다. 펠레는 이번 대회 개막 전 SNS에 "내가 지나치게 자신감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브라질이 다시 우승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이번에는 펠레의 저주가 풀릴 수 있을까.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위 브라질 축구대표팀이 앞으로 3번 더 이기면 펠레의 소망은 이뤄진다. 브라질은 9일 자정에 크로아티아와 8강전을 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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