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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원배의 시선

저렴한 공공요금의 역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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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원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원배 논설위원

김원배 논설위원

“가정에서 가장 전기를 많이 낭비하는 게 비데의 온열 시트와 정수기의 온수 기능이다.”

정부가 운영하는 대한민국 정책브리핑(11월 16일)에 ‘에너지 절약 실천하는 생활 습관은?’이란 제목으로 올라온 글의 한 대목이다.

9월 말 정부는 올겨울 에너지 사용량 10% 절감을 목표로 하는 절약 운동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공공부문이 앞장서고 있다지만 아직 민간 차원의 에너지 절약이 활발하다고 보긴 어렵다.

국내 전기요금은 국제적으로 비교해도 낮은 수준이다. 한국전력에 따르면 2021년 기준으로 한국의 가정용 전기요금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4번째로 낮았다. OECD 평균의 60% 수준이다.

천연가스와 원유 가격이 급등하면서 전력 생산에 필요한 연료비가 크게 올랐음에도 정부는 전기요금 인상을 억제해왔다. 물가 부담 때문이다. 한전이 발전사에서 전력을 구입하는 도매가격(SMP)을 보면 지난해 11월 1kWh당 127.06원이었지만 올해 11월은 두 배에 가까운 242.19원으로 치솟았다. 반면 올해 전기요금은 1kWh당 19.3원 오르는 데 그쳤다.

원가 이하 요금이 공기업 부채로
채권시장 흔들고 노사 갈등 유발
원가 검증하고 요금 현실화해야

이는 한전의 대규모 적자로 이어졌다. 한전은 올해 9월 말까지 21조8000억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올해 전체로는 30조원을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2019년 말 128조원이던 한전의 부채는 올해 말 180조원에 육박할 것으로 보인다.

원가에 미치지 못하는 저렴한 공공요금은 해당 서비스를 하는 공기업의 부채로 귀결된다. 공짜 점심은 없다. 공기업의 빚이 늘어난다는 것은 결국 미래 세대의 부담이 된다.

그런데 생각보다 일찍 문제가 터졌다. 한전이 적자를 메우기 위해 한전채를 대량 발행하자 채권시장이 혼란에 빠졌다. 원화로 발행되는 한전채는 사실상 정부가 보증하기 때문에 재무 상태와 관계없이 최고 신용등급을 받는다. 이런 채권이 대량 발행돼 시중 자금을 빨아들이니 일반 기업이 회사채 시장에서 높은 금리를 주고도 자금을 조달하기 힘들어졌다. 강원도의 보증채무 불이행에 따른 레고랜드발 채권시장 경색이라고 알려졌지만, 실은 한전채라는 마른 장작이 쌓인 상태에서 불이 붙은 것이다. 원가 이하의 전기 요금이 채권시장 교란으로 이어진 것은 전에는 보지 못한 현상이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산하 공기업은 만성 적자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얼마 전 파업을 했다 철회한 서울교통공사도 2020년 1조1137억원, 지난해엔 9644억원의 당기순손실을 냈다. 서울지하철 기본요금은 2015년 1250원으로 조정된 이후 7년 동안 변동이 없다. 반면 승객 1인당 수송원가는 2000원을 넘는다고 한다.

서울교통공사의 사례에서 보듯 적자 공기업엔 구조조정의 압력이 들어갈 수밖에 없고 노사 갈등 요인이 될 수 있다. 원가에 못 미치는 요금과 65세 이상의 무임승차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인력 감축만 요구하면 노조가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물론 지금 같은 물가 상승기에 공공요금까지 올리는 것은 부담이 된다. 물가 지표가 나오면 임금과 비용 상승이 뒤따른다. 정치적으로도 인기 없는 정책이다. 하지만 적절한 수준으로 현실화를 하지 않으면 더 큰 대가를 치를 수 있다는 것을 한전채 사태가 보여줬다.

시장 경제에서 가격은 수요를 조절한다. 전기 요금이 오르면 불필요한 전력 소비를 줄이는 효과가 있다. 한전에 따르면 전력 소비를 10% 줄이면 연간 15조원의 에너지 수입을 절감할 수 있다고 한다.

공공요금 현실화를 주장하는 박진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에 해법을 물어봤다. 박 교수는 “일정한 산식을 만들어 원가가 변동하면 요금에 반영하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주무 부처의 입김에서 자유로운 공공요금 독립규제기구 설치도 제안했다. 전기요금의 경우 산업통상자원부에서 독립된 기구가 요금을 정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당연히 원가 검증도 철저하게 해야 한다. 박 교수는 “공공서비스 원가는 대부분 이를 운영하는 공기업이 산출하는데, 이 원가의 적정성에 대해 초기 단계부터 철저한 외부 검증을 해야 한다”며 “이렇게 해야만 요금을 올릴 때 국민을 납득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공공요금을 올리면 저소득 취약 계층이 어려움을 겪는다. 이는 복지 차원에서 재정이 감당해야 한다.

그는 지역별 전기요금 차등제도 제안했다. 송전 거리가 먼 수도권이 발전소가 가까운 지역보다 전기요금을 더 부담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이런 제도가 단번에 도입되긴 어렵겠지만 논의는 해볼 시기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