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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오영환의 지방시대

인구 3만 ‘노잼’ 산촌에 책 문화 생태계 다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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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환
오영환 기자 중앙일보 지역전문기자

괴산군 귀촌 7명의 도전

오영환 지역전문기자 겸 대구지사장

오영환 지역전문기자 겸 대구지사장

통념 파괴였다. 책방은 400여m 높이의 산 아래 57가구 전원 마을의 한 집이었다. 1, 2층 126㎡의 거실과 방은 천정까지 책으로 덮였다. 갖가지 장르와 색상으로 가지런히 꽂힌 책들은 흡사 모자이크 조각이었다. 지난달 30일 들른 충북 괴산군 칠성면 미루마을의 ‘숲속작은책방’은 작지도, 정적이지도 않았다. 넓게는 인구 3만7000명의 괴산군, 좁게는 인구 3000명인 칠성면의 문화 교차로와 청소년 도서 체험장으로 자리 잡은 지 8년째다. 유럽의 시골 책 마을 견학 경험을 녹인 책방은 관광 명소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귀촌한 백창화 대표와 남편 김병록(59)씨는 “유명한 책방보다 지역의 소중한 책방이 되고 싶은 게 꿈”이라고 했다. 백씨는 서울에서 출판 편집을 하다 작은 도서관을 운영했고, 김씨는 직장 생활을 했다.

괴산에는 김씨 부부를 포함해 서울에서 출판·도서관·사진·영화 등 문화예술 분야에서 일하다 온 인사들이 적잖다. 2020년 정착한 엄유주씨는 출판사 열매문고를 운영한다. 단행본과 비매품 마을 콘텐트를 만들고, 어린이 대상 글쓰기 수업도 하고 있다. 작가 출신인 그는 ‘유기농 책을 만듭니다’라는 글귀를 명함에 넣고 다닌다.

출판사·서점 6곳 네트워크 결성
지역 콘텐트 담은 잡지 ‘툭’ 만들고
북콘서트, 글쓰기 수업으로 새 바람
“로컬에서 희망의 길 열어 제칠 터”

서울에서 귀촌한 괴산책문화네트워크 멤버들이 지난달 30일 칠성면 미루마을의 숲속작은책방에서 활짝 웃고 있다. 왼쪽부터 이 책방을 운영하는 김병록·백창화(네트워크 대표)씨 부부, 천정한 정한 책방 대표, 1인 출판사를 운영하는 엄유주·임희선씨. 오영환 기자

서울에서 귀촌한 괴산책문화네트워크 멤버들이 지난달 30일 칠성면 미루마을의 숲속작은책방에서 활짝 웃고 있다. 왼쪽부터 이 책방을 운영하는 김병록·백창화(네트워크 대표)씨 부부, 천정한 정한 책방 대표, 1인 출판사를 운영하는 엄유주·임희선씨. 오영환 기자

도서출판 정한책방의 천정한(46) 대표는 2019년 이래 괴산에서 출판과 지역 문화 콘텐트 기획사(문화잇다) 일을 병행한다. 문화잇다는 아내 박희영씨가 공동대표다. 정한책방은 창업 7년째로 인문사회 교양 도서와 외주 도서 제작으로 주목받고 있다. 청천면의 집 한 쪽에 따로 마련한 20㎡ 규모 공간은 자사 출간 서적과 헌책을 파는 동네 책방이자 저자 특강·북 콘서트를 여는 문화 사랑방이기도 하다. 지역의 출판사·서점·도서관·독자가 하나의 책 문화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 그의 꿈이다.

출판사 쿠쿠루쿠쿠를 운영하는 임희선씨는 2019년 부모를 따라왔다. 독일 유학 중 몸이 좋지 않아 가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괴산에 20대 후반에 오게 됐다. 그 이후 다섯 권의 책을 냈고, 어린이 대상 수업도 한다. 건강은 거의 회복했다고 한다. 목도사진관과 자루북스를 운영하는 이영규(여)씨는 출판 편집을 하다 역시 2019년 이주했다. “혼자 카메라를 들고 사방천지를 돌아다니던 나에게 사람을 만나는 사진은 가장 어려운 도전”이라며 “괴산의 어르신들 이야기를 자루 속에 털어 담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라고 했다.

귀촌 인사들의 4개 출판사와 2개 서점, 1개의 사진관은 괴산에 굴러들어온 복덩어리다. 산림 면적 76%의 중부지방 한복판 산촌은 문화예술과 거리가 먼 터였다. 요샛말로 노잼(no+재미) 지역이다. 이들 7곳이 콘텐트의 그릇에 지역을 담고 지역민을 잇고 북 콘서트와 낭독회 등 행사로 외부 인사를 불러들이는 가치는 헤아리기 어렵다. 지방 소멸은 인구 유출과 일자리 부족으로만 일어나지 않는다. 문화가 깃들지 않고, 이벤트가 없는 곳에 사람은 꼬이지 않는다. 자연환경에 문화예술을 입힌 매력 마을은 젊은이 유출을 막는 버팀목이고, 외부 인구 유입의 견인차다.

괴산로컬잡지 ‘툭’ 창간호 표지.

괴산로컬잡지 ‘툭’ 창간호 표지.

이들 7곳은 각각의 점(點)에서 하나의 선(線)이 됐다. 서로 얼굴을 익혀오다 지난해 6월 협의체를 만들어 지역 콘텐트 발굴에 나섰다. 올 3월에는 괴산책문화네트워크(대표 백창화)를 결성했다. 취지는 세 가지다. 첫째는 지역 콘텐트 생산과 전국 유통을 통한 출판문화 사업 활성화다. 둘째는 이를 통한 구전(口傳) 문화 복원과 유무형 마을 자산의 스토리텔링이다. 마지막은 책과 문화가 있는 농촌 마을 만들기다. 네트워크는 그 일환으로 지난 9월 괴산과 괴산인을 소재로 한 로컬 잡지 ‘툭(to ook)’ 을 창간했다. 툭은 ‘툭 던지다’의 그 툭이다.

잡지 표지는 툭의 지향점을 상징한다. 노란 회화나무(槐·괴)에 앉아있는 이무기(蛟·교) 인형 사진을 올렸다. 회화나무는 괴산과, 이무기는 조선 시대 새 세상을 꿈꿨던 허균의 호(蛟山)와 맞물려 있다. 콘텐트 제작에는 네트워크 구성원 7명 모두가 참가했다. 내용은 창간호인 만큼 구성원 자기 소개·대담과 더불어 지역민 이야기와 사진으로 꾸몄다.

불정면 목도리에서 40년 넘게 이발소를 하는 장성칠씨, 감물면 박달마을에서 나서 아흔다섯인 지금까지 고향을 지키는 이덕재씨 등등. 그들 삶의 여정이 한국 농촌의 현대사이고, 한 마디 한 마디가 향토 문화였다. 솔맹이골 작은도서관과 청년 농부 이야기, 괴산 장날의 풍경 등 기사에도 사람 냄새가 풀풀 난다. 현장과 발품의 힘이다.

구성원 인터뷰와 잡지 대담을 통해 들여다본 그들의 괴산 정착기는 긴 듯했다.

“마을 주민과 이주민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는데 귀촌 정책을 마련한 괴산군이 조정 역할을 해주지 못해 아쉬웠다. 지금은 이사해 만족스럽게 정착해가고 있다.” (박희영씨)

“저도 처음에 어려움이 많았는데 견디게 해준 것은 자연이었다. 자연은 치유의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백창화씨)

임희선씨는 “논에 물을 대는 것도, 뻐꾸기와 개구리 소리도 처음 접했다”고 했고, 엄유주씨는 “매달 생활비가 얼마인지도 모르는 삶에서 해방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아쉬웠던 점도 툭 털어놓았다.

“귀농보다 귀촌이 늘어나는 추세인데, 지원이나 혜택이 부족한 것 같다. 문화예술 귀촌에 더 관심을 기울여주면 좋겠다.” (백창화씨)

“사진관을 연지 3년째인데 이것만으로는 절대 먹고 살 수가 없다. 시골이 워낙 인구가 적다 보니 경제 규모가 되지 않는다. 경제 논리로 생각하면 누가 시골에 와서 문화사업을 하겠는가. 지자체에서 정책적으로 시스템을 만들어줘야 한다.” (이영규씨)

“청년을 위한 정책 등이 대부분 농업과 관련된 것이고, 문화예술 관련은 하나도 없어 고민이 많았다.” (엄유주씨)

괴산책문화네트워크가 지난 10월 기획한 제1회 괴산책문화 축제 모습. [사진 네트워크]

괴산책문화네트워크가 지난 10월 기획한 제1회 괴산책문화 축제 모습. [사진 네트워크]

박희영씨는 “공무원들은 문화를 얘기하면 가장 먼저 경제적인 효과를 묻는다. 문화예술이 경제 효과를 불러오려면 경험과 오랜 시간이 필요한데 그런 고려가 없는 게 아쉽다”고 했다.

그들은 어떤 꿈을 그리는 것일까.

“수도권이 아닌 농촌에도 좋은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알리고 싶다.” (임희선씨)

“‘툭’이 나오기 전과 후는 분명히 다를 것으로 본다. 책 문화 하면 괴산, 괴산 하면 책 문화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천정한씨)

김병록씨는 “숲속작은책방이 농촌 마을 서점과 북스테이라는 새 바람을 일으켰듯 괴산책문화네트워크가 로컬에서 희망을 찾는 새 길을 열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툭 1호는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사업에 선정돼 출간 지원을 받았다. 지역 문화 진흥 프로젝트에 대해선 중앙 정부나 지자체가 지방 회생 차원에서 접근하면 어떨까 싶다. 지역의, 지역을 위한, 지역민에 의한 로컬 콘텐트 사업은 지방 소멸에 맞서는 또 다른 도전이다. 문화와 산업에 대한 통념을 깨야 지방도 바뀐다. 괴산형 책 문화 생태계 구축 작업이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모델로 퍼져나가길 기대해본다.

지난해 귀촌 인구 50만명에 평균 나이 43세…가구 평균 생활비는 205만원

괴산책문화네트워크를 계기로 본 귀촌 인구는 한해 얼마나 될까. ‘2021년 귀농어·귀촌인 통계’에 따르면 귀촌 가구는 36만3397가구로 전년보다 5.3% 늘었다. 귀촌 가구 중 75.2%는 1인 가구이고, 12.8%는 ‘산림 면적 70% 이상’ 등으로 규정된 산촌 지역 이주였다. 귀촌의 통계 기준은 동(洞) 지역에서 1년 이상 거주한 사람의 읍·면(邑面) 이동이다. 귀촌 가구 전입 사유는 취업·사업 등 직업이 34.3%로 가장 많고, 다음은 집 구입 등 주택(27.1%), 가족(22.2%), 자연환경(4.9%), 주거환경(2.9%), 교육(2.0%) 순이다.

귀촌인은 49만5658명이고, 평균 나이는 42.8세다. 연령대 별로는 20대 이하가 26.0%로 가장 많고, 다음은 30대(20.8%), 50대(16.9%) 순이다. 귀촌 전 거주 지역은 경기도(26.6%), 서울(14.7%) 등 수도권이 45.5%를 차지했다. 귀촌인 규모가 많은 상위 5개 지자체는 화성시(2만2533명), 남양주시(2만955명), 평택시(1만8976명), 아산시(1만7408명), 경기도 광주시(1만7396명) 이다. 지난해 귀농, 귀어 가구는 각각 1만4347, 1135가구로 집계됐다.

귀촌 유형은 도시에서 태어나 비연고지로 가는 유형(I형²)이 33.8%로 가장 많았다(‘2020년 귀농·귀촌 실태 조사’). 농촌에서 나서 도시 생활 후 각각 연고지와 비연고지로 이주하는 U형과 J형은 같은 28%대였고, 도시에서 나 연고지로 가는 I형¹은 9.2%였다. 귀농은 U형이 57.5%로 압도적이었다. 귀촌 가구의 월평균 생활비는 205만원이고, 지출 항목은 식비가 60.8%나 됐다. 귀촌 가구의 만족도는 만족 63.3%, 보통 35.4%, 불만족 1.3%로 조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