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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국적·연령 차별 말라”는 인권헌장 두고 맞불집회...들끓는 서울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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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정문 모습. 이병준 기자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정문 모습. 이병준 기자

‘서울대학교 구성원은 성별, 국적, 인종, 장애, 출신 지역과 학교, 연령, 종교, 임신과 출산, 정치적 의견, 성적 지향 및 성별 정체성, 사회·경제적 배경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서울대를 갈라지게 한 건 이 109자짜리 한 문장이었다. 서울대가 2020년부터 학교 차원에서 제정을 추진하고 있는 인권 규정인 ‘인권헌장’ 초안 제3조 1항엔 어떠한 사유로도 학내 구성원의 차별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않는다’는 헌법 제11조와 유사하지만, 일부 기독교 단체 등은 해당 조항을 두고 ‘동성애를 옹호하는 것 아니냐’며 제정 시도를 중단하라고 주장했다. 학내외 반발로 2년간 헌장 제정 논의는 학내 평의원회 안건에 상정되지도 못한 채 공회전했다.

‘학생 찬성 76.5%’ 조사 결과에…논의 급물살

서울대 인권헌장 초안의 내용. 사진 서울대학교 홈페이지 캡쳐

서울대 인권헌장 초안의 내용. 사진 서울대학교 홈페이지 캡쳐

 기류가 바뀐 건 서울대 학내 기구인 다양성위원회의 조사 결과였다. 다양성위가 서울대 학생 5363명을 대상으로 지난 10월 18일부터 지난달 3일까지 설문을 진행한 결과, 응답자 4명 중 3명 이상(76.5%)이 인권헌장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나면서다. 지난해 다양성위 연구 결과(57.7%)보다 18.7%포인트 높아진 수치였다. 응답자 중엔 인권헌장 제정에 대해 중립이라는 응답이 19.7%로 뒤를 이었고, ‘동의하지 않는다’는 응답자는 3.83%에 그쳤다. 가장 논란이 됐던 제3조 1항에 대한 찬성률은 97.2%에 달했다.

 다양성위가 연내 인권헌장 관련 종합보고서를 학교 본부에 제출하기로 하는 등 논의가 급물살을 타자 찬반 단체들은 집회에 나섰다. 지난 6일 서울대학교기독교수협의회 등은 교내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인권헌장이 양심·표현·학문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회견문을 통해 “논란의 중심에 있는 개념들을 서울대의 인권 규범에 차별 금지 사유로 적시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며 “헌장은 보편적 헌법 이론과 부합하지 않으며, 동성애·젠더 이데올로기의 전체주의적 독재를 초래한다”고 주장했다.

 인권헌장을 지지하는 서울대생 21명도 8일 관악캠퍼스 아크로폴리스에 모여 ‘맞불’ 기자회견을 열고 "더는 미룰 수 없다. 인권헌장 제정하라"를 외쳤다. 이들은 다양성위의 조사 결과를 언급하며 “지난 몇 년간 인권헌장의 제정을 가로막은 구성원 간의 ‘합의’의 결실이 증명된 셈”이라며 “미래를 위해서는 그 누구에 대한 혐오도, 차별도 없어 모두가 자유로운 공론장에 평등하게 참여하며 더욱더 나은 미래를 그려나갈 기반이 필요하다”고 했다.

 회견에 참여한 서울대 성 소수자 동아리 QIS 소속의 신승호(19)씨는 “인권 헌장이 지키고자 하는 사람은 성 소수자에 한정되지 않는다. 성 소수자뿐 아니라 학교에 있는 모든 여성이나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규정”이라며 “인권 헌장이 제정되기 전까지는 활동을 계속하려 한다”고 말했다. 총 18개의 조항으로 구성된 인권헌장 초안엔 논란이 된 차별 금지 조항 외에도 서울대 구성원들의 인격권과 표현 등의 자유, 학업 및 연구에 대한 권리를 보장한다는 내용 등이 포함돼 있다.

“학생 인권 명문화해야” “표현의 자유”

8일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에서 서울대 인권헌장 학생추진위원회가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중앙포토

8일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에서 서울대 인권헌장 학생추진위원회가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중앙포토

 8일 서울대에서 만난 학생 대부분은 인권 헌장 제정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자유전공학부에 재학 중인 신승원(19)씨는 “(인권 관련) 여러 학내 사건 사고가 있었고, 그게 아니라도 인권헌장이 포괄하는 인권의 내용이 부당한 것 같진 않다”며 “제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인문대 재학생 김모(20)씨는 “학생 인권이 명문화돼야 한다”며 “차별금지법과 같이 명시적으로 법률이 제정된 것이 아니기에 학교 규정이라도 있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반면 캠퍼스에서 만난 A씨는 “학생의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점은 동의한다”면서도 “발언과 표현의 자유가 있는데, 이를 표현하는 걸 틀렸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서울대 교수는 "인권은 합의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라며 “서울대가 앞장서 이를 선포하고 논의를 선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홍성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에서도 전반적으로 인권 헌장과 같은 선언이 이뤄질 필요가 있다”며 “무엇보다도 대학이, 특히 서울대가 (인권에) 앞장서는 건 당연하다”고 했다.

 서울대에서 규정을 제정하려면 학칙상 총장이 7일 이상 공고한 후, 학사위원회와 평의원회를 거쳐 공포해야 한다. 서울대 관계자는 “다음 절차에 대해 내부에서 뚜렷하게 논의된 건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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