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는 다채로운 이력을 갖고 있다. 사격 선수로 학창시절을 보내다 20대 초반에 ‘대박’친 시집을 내더니, 작사가·영화감독·드라마 작가도 했다가, 또 다시 시집을 냈다.
시인 원태연 『너에게 전화가 왔다』
지난달 새 시집 『너에게 전화가 왔다』(은행나무)을 펴낸 원태연(51) 시인의 얘기다. 그는 1992년 펴낸 첫 시집 『넌 가끔가다 내 생각을 하지 난 가끔가다 딴 생각을 해』(영운기획)가 150만부 넘게 팔릴 정도로 인기를 끌면서, 단박에 유명인사가 됐다. ‘내 입술… 따뜻한 커피처럼’(샵), ‘그 남자’(현빈) 등의 히트곡을 작사하기도 했다.
저작권료 수입 만으로도 부족하지 않게 살 정도인 그가 다시 시로 돌아온 건 오랜 팬에게 한 약속이 발단이었다. 지난해 과거작들이 포함된 시집을 낸 뒤, ‘한 페이지도 허투루 쓰지 않은 새 시집을 내겠다’는 팬과의 약속을 지키려 2002년 『안녕』(자음과 모음) 이후 20년 만에 새 시집을 낸 것이다.
150만부 팔고도 '이방인' 취급 받던 시인, "세상이 바뀐 듯, 오래 살고 볼 일"
“이번에 왜 이렇게 인터뷰 의뢰가 많을까 했는데 세상이 바뀐 거죠. 오래 살고 볼 일이에요.”
지난 5일 서울 서초구 작업실에서 만난 원태연은 첫 마디를 이렇게 뗐다. 한 세대의 기억에 각인된 베스트셀러 시인이지만, 등단한 작가들 위주로 꾸려진 ‘문단’의 시각에서 볼 때 그는 이방인이었다.
서점에서는 그의 책을 ‘시’가 아닌 ‘청소년 명랑시’로 분류해 순위를 매겼고, 새 시집을 내도 언론 인터뷰 의뢰는 많지 않았다. 그는 "'야, 그런 시는 나도 써'라는 말을 할 수 있게 판을 바꾼 셈이라, 나는 오히려 (시의 대중화에) 공을 세운 거라 생각한다"며 “그때는 상처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당시 문단의 반응이 이해는 가고, 이제 크게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사랑 시만 쓴다’고 낮춰보는 시각이 많았지만, 이번엔 처음부터 출판사에서 ‘사랑 시만 쓰자’고 제안해 집필을 시작했다.
'전화가 옵니다 / 당신입니다 / 겁도 없습니다 / 받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표제작 '너에게 전화가 왔다'를 비롯해 85편 대부분은 한 눈에 들어올 만큼 짧다. '나도 소중한 사람입니까'('빈 잔'), '먼지가 보일 때가 있어'('금단 현상')처럼 한 문장 짜리 시도 여럿이고, 심지어 '나뭇잎 뜯기'는 '외롭다' 한 단어가 시다.
일부러 짧게 쓰려고 한 건 아니고 "가장 아름다운 형태를 찾아 줄이다 보니 짧아졌다"고 했다. 마감은 없었지만, ‘이번에 시집을 못 내면 다음에 낼 수 있을까?’ 라는 걱정에 한동안 잠이 안 왔다고 했다. 오히려 잠이 부족한 상태에서 시가 나오기 시작해 13개월 만에 완성했단다.
애타고 슬픈 사랑 글… 현빈 '그 남자'는 할머니 빈소에서 봤다
그가 쓰는 시와 가사는 다 사랑 이야기지만, 행복하고 충만한 빛나는 순간의 사랑은 거의 없다. 애타게 그리워하고 슬프고 마음 졸이는 사랑이다. 이유를 물었더니 "슬픈 감정을 섞어 써야 가장 아름다워서"라는 답변이 왔다.
이렇게 슬픔이 많으면 힘들지 않냐고 되물었더니 "사는 게 되게 힘들어요"라고 답한 그는 인터뷰 중에도 여러 차례 눈이 촉촉해졌다.
사랑 시로 유명해진 뒤, 가수 겸 작곡가 김현철의 제안으로 작사의 길에 발을 들인 그가 '슬픔'으로 풀어낸 가사들의 뒷 이야기도 흥미롭다. '내 입술.. 따뜻한 커피처럼'의 '삶의 반직선 위에 점일 뿐이야' 같은 랩 가사는 "철학적으로 쓰려고" 고민한 끝에 나온 결과물이고, 그의 최대 히트작인 SBS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OST '그 남자'는 가수 백지영이 부른 OST '그 여자'를 녹음한 뒤 "혹시 모르니 남자 버전도 만들자"고 해서 만들어둔 곡이었다고 한다. 곡이 공개된 2011년 1월 7일은 할머니가 돌아가신 직후였다. 그는 '천장을 뚫은 차트'를 장례식장에서 봤다고 한다.
'대기만성' 난독증 시인, "다음은 사전 만들고 싶어, 첫 단어는 '이방인'"
원태연은 중학교 때 MBC 드라마 '사랑과 야망'을 보고 드라마 작가를 꿈꿨고, '공부 안하고 이것만 해도 대학 갈 수 있다'는 말에 사격을 했다. 그러나 지난해 작업하던 첫 드라마에서 손을 뗀 뒤 드라마 작가에 대한 미련은 완전히 버렸고, 사격도 지금은 남의 일이 됐지만, 올해 '난독증협회 홍보대사'란 새로운 일이 생겼다.
지난해 출연한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 "사실 난독증이 있다"고 고백한 걸 보고, 협회에서 제안했다고 한다. 난독증 탓에 공부는 잘 하지 못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너는 대기만성 형"이라며 지켜봐 줬다고 한다.
'감성시인'이란 수식어가 싫었지만 지금은 인정한다는 원태연은 "앞으로 하고 싶은 건 사전 만들기"라고 했다. '감성시인'의 '감성'의 뜻을 곱씹어보다가 나름의 사전을 만들고 싶어졌다고 했다. 그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첫 단어는 '이방인'이다. 그가 정의하는 '이방인'은 '나를 위해 울어줄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