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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석용 신화’ 보다 중요한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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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박수련 기자 중앙일보 산업부장
박수련 IT 산업부장

박수련 IT 산업부장

인사철이다. 새 얼굴에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는 시절에도, ‘물러난다’는 소식으로 더 큰 주목을 받는 CEO가 있다. 국내 ‘최장수 CEO’인 차석용 LG생활건강 부회장이다. 2005년부터 이 회사를 이끈 그는 62분기 연속 매출 증가, 시총 44배 성장(재임 14.6년 기준) 등 ‘차석용 매직’으로 유명하다. 그가 장수했기에 이런 성과를 냈는지, 일을 잘했으니 장수한 것인지 ‘닭과 달걀’을 따지긴 어렵다. 어느 쪽이든 이사회로선 이런 CEO를 붙들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차석용은 아웃라이어(outlier, 극단적 사례)에 가깝다. 국내 대부분의 CEO는 차석용 임기의 20% 정도만에 물러난다. 기업분석업체 CEO스코어가 2020년 사업보고서를 낸 347개 기업의 최근 10년간 대표 재임 기간을 따져보니 3.6년에 불과했다.

왼쪽부터 구글 전 CEO 에릭 슈밋, 팀 쿡(애플)·최수연(네이버)·이정헌(넥슨코리아) CEO. [로이터·AP·각사]

왼쪽부터 구글 전 CEO 에릭 슈밋, 팀 쿡(애플)·최수연(네이버)·이정헌(넥슨코리아) CEO. [로이터·AP·각사]

해외에선 어떨까. 글로벌 컨설팅업체 PwC가 낸 ‘성공하는 CEO 연구’(2019년)에 따르면, 글로벌 2500개 상장사 중 CEO가 10년 이상 자리를 지킨 경우는 약 19%였다. 이들 재임 기간은 평균 14년, 전체 평균(5년)의 3배에 가깝다. 여기서도 장기 집권 CEO들의 성과가 탁월했다고 한다.

문제는 그 이후부터다. ‘구관이 명관’인 회사의 후임 CEO들은 임기를 못 채우고 밀려 나는 경우가 더 많았다. 후임 CEO의 69%는 전임자 때 상위 25% 안에 들던 기업의 성과 수준을 하위 50% 그룹으로 떨어뜨렸다.

그래서 기업의 지속가능성은 성공한 CEO 혹은 창업자 그다음에 달렸다. ‘차석용’ 한 명이 아니라 ‘제2의 차석용’을 계속 배출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후임자의 실패 확률을 낮추고, 지속 성장의 구조를 만드는 게 현직 CEO 혹은 이사회의 역할이다. 스타트업이라면 창업자가 해야 할 일이다. 창업자에게 자기가 세운 기업을 더 크게 성장시킬 수 있는 ‘기업가’를 찾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또 있을까. ‘누구에게 넘겨줄 것인가.’ 이 고민을 오래 한 스티브 잡스는 팀 쿡을 곁에 뒀고, 그 답을 냉정하게 찾은 세쿼이아캐피탈은 구글의 공동창업자들에게 ‘CEO 자리를 에릭 슈밋에게 넘기라’고 조언했다. 반면 창업자가 줄곧 CEO인 메타는 ‘장기 집권 CEO×창업자’ 리스크에 빠져든 모양새다.

요즘 한국 IT 대기업들을 보면 후임 ‘준비’ 수준이 기업의 명운을 가를 수도 있겠다 싶다. 사원 출신 CEO를  2회 연속 배출한 넥슨코리아나 80년대생 CEO로 세대교체를 수년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한 네이버는 그중 모범 사례로 꼽힌다. 해당 CEO들의 성취를 평가하긴 이르지만, 적어도 이들 기업은 누구에게 경영을 맡길지 고민하고 육성할 구조를 갖췄다는 게 중요하다. 지금 당신이 다니는(혹은 투자한) 기업은 그런 구조를 갖추었는가. 따져보면 그 기업의 5년 후, 10년 후가 보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