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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변양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빚쟁이에 시달려봤나"…코스피 최고치, 盧는 심각히 걱정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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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주정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변양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진영을 넘어 미래를 그리다 〈10〉 미리 대비한 글로벌 금융위기

변양균 전 기획예산처 장관

변양균 전 기획예산처 장관

‘퍼펙트 스톰’이란 유명한 재난영화가 있다. 원래 기상 용어였던 퍼펙트 스톰은 이제는 경제 뉴스에서 자주 등장한다. 여러 가지 악재가 동시다발로 터지면서 초대형 경제위기가 발생하는 걸 가리킨다. 기상 현상과 마찬가지로 경제위기에도 조짐이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전에도 여러 가지 이상 신호가 나타났다. 당시엔 잘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경제위기를 예고하는 조짐이었다.

내가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있던 2006년 10~11월이다. 외환위기 10년을 맞는 2007년이 코앞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여러 차례 외환위기 때 일에 관해 물었다. 이규성 전 재정경제부 장관이 얼마 전 펴낸 책 얘기도 나왔다. 『한국의 외환위기』란 제목의 1080쪽짜리인데 그걸 다 읽어봤다고 했다. 외환위기의 발생 원인과 충격, 극복 과정, 재발 방지를 위한 제언 등을 담은 책이었다.

위기 조짐 보이는데 증시는 호황
“빚내서 투자 못하게 막아라” 특명
이규성 불러 외환위기 경험 자문
총리로 내정했다가 막판에 바꿔

종합주가지수(코스피)가 처음으로 1800선을 넘어선 2007년 6월 18일 증권선물거래소(현 한국거래소) 직원이 주가 전광판을 살펴보고 있다. 이듬해 9월 미국 대형 투자은행인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중앙포토]

종합주가지수(코스피)가 처음으로 1800선을 넘어선 2007년 6월 18일 증권선물거래소(현 한국거래소) 직원이 주가 전광판을 살펴보고 있다. 이듬해 9월 미국 대형 투자은행인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중앙포토]

노 대통령은 진지하게 물었다. “혹시 위기가 재발할 우려는 없겠습니까.” 나는 괜찮을 거라는 식으로 대답했다. 노 대통령은 계속 걱정스러워 했다. 그러면서 외환위기 백서 작성을 지시했다. “외환위기 10년이 됐는데 국가 차원에서 반성하는 의미의 백서 하나 없으면 되겠습니까.” 나는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대통령 뜻을 전했다. KDI는 이듬해 12월 『외환위기 10년: 평가와 과제』란 제목으로 백서를 펴냈다.

얼마 뒤 한명숙 총리가 물러나기로 결정했다. 열린우리당 대선 후보 경선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병완 청와대 비서실장이 차기 총리 후보로 이 전 장관을 추천했다. 나도 찬성이었다. 그는 김대중 정부의 첫 재경부 장관을 맡아 외환위기 극복에 앞장선 경력이 있었다. 재경부 직원들이 존경하는 역대 장관으로 꼽을 정도로 주변 신망도 두터웠다. 고향이 충남 논산이어서 지역 균형 인사에도 맞았다. 이 실장은 예전 신문기자 시절부터 이 전 장관과 각별한 친분이 있었다.

청와대 만찬에 이규성 전 장관 초대

서울 강남의 이 전 장관 개인 사무실을 찾아갔다. 당시 과도한 엔화 약세가 우리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등을 논의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노 대통령이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 싶어 하십니다.” 이 전 장관도 “좋다”고 했다.

2007년 초 청와대 관저에서 노 대통령과 이 전 장관이 만났다. 두 사람 사이에서 배석자는 나 혼자였다. 노 대통령이 직접 총리로 모시겠다는 말을 꺼내진 않았다. 그래도 이 전 장관은 대강 눈치를 채고 있었다. 보수 성향의 경제 관료 출신을 노 대통령이 따로 만나는 것 자체가 이례적이었다.

대화 분위기는 생산적이었다. 이 전 장관도 나름의 아이디어를 풀어놨다. 그중에 ‘10만 양병론’이 기억에 남는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출산율이 낮아지고 인구가 줄어들면 대학 운영도 어려워진다. 동남아 젊은 인재들에게 과감하게 장학금을 줘서 유학생으로 불러들이자. 매년 일정한 인원을 배정해 총 10만 명을 이런 식으로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자.’ 미국의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본뜬 한국판 풀브라이트를 만들자는 구상이었다.

이후 내부적으로 이 전 장관으로 인사 검증 절차를 밟으려고 했다. 그러던 중 한덕수 전 경제부총리로 총리 내정자가 바뀌었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른다. 총리 후보 발표 전날인 2007년 3월 8일 오후 9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노 대통령이 급하게 전화로 나를 찾았다. 서둘러 대통령 관저로 갔다. 여권 거물급 정치인이 조금 전에 다녀갔는데 한 총리 인선에 강하게 반대했다고 했다.

노 대통령이 내 의견을 물었다. 나는 과거 좋지 않았던 사례로 김영삼 대통령과 이회창 총리의 관계를 들었다. “정권 말에 정치적 욕망이 있는 총리는 곤란합니다. 특히 대통령에게 덤벼드는 총리는 안 됩니다. 한 총리는 절대 그럴 일이 없을 겁니다. 특별한 정치적 욕망이 없는 경제 관료여서 믿을 수 있을 겁니다.” 솔직한 내 생각이었다. 그리고 집으로 갔다. 다음날 그대로 한 총리로 발표가 났다.

미국발 ‘서브프라임 부실’ 전조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8년 11월 13일 국회에서 열린 정책포럼에서 이규성 전 재정경제부 장관(오른쪽)이 강연하고 있다. [중앙포토]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8년 11월 13일 국회에서 열린 정책포럼에서 이규성 전 재정경제부 장관(오른쪽)이 강연하고 있다. [중앙포토]

2007년에 들어서자 해외에서 불안한 소식이 잇따라 들려왔다. 2월에는 영국계 HSBC은행이 미국 주택담보대출 시장에서 대규모 손실을 봤다고 발표했다. 한때 자산 규모를 기준으로 세계 1위였던 은행이다. 3월에는 미국의 뉴센추리파이낸셜이란 대형 금융회사가 파산을 선언했다. 5월에는 스위스계 UBS은행도 미국 시장에서 대규모 손실을 봤다고 공개했다.

세 곳 모두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의 부실이 원인이었다. 그런데도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은 “서브프라임 시장의 문제가 금융 시스템 전반으로 확산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2007년 6월 초였다. 국내 증시가 굉장히 좋았다. 종합주가지수(코스피)는 1700선을 웃돌았다. 노무현 정부 출범 초(500선)와 비교하면 세 배 이상으로 올랐다. 나는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노 대통령은 오히려 걱정이었다. “증시가 너무 과열되는 것 아닙니까. 빚내서 투자하는 건 못하게 해야 합니다.” 솔직히 건성으로 들었다. 속으로 이런 생각이었다. ‘주식 투자는 자기 책임으로 하는 건데 정부가 하라 마라 할 수 있나.’ 그렇게 속된 말로 대통령 지시를 뭉개고 있었다.

당시 국내 거시경제 지표는 양호했다. 2007년 수출은 3700억 달러를 돌파했고 무역수지도 꾸준한 흑자였다. 외환보유액은 2400억 달러 수준으로 세계 5위에 올랐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2007년에 처음으로 2만 달러를 넘어섰다. 이때만 해도 나는 글로벌 금융 시스템 전체가 무너질 거란 생각은 꿈에도 못했다.

일주일인가 지나서 노 대통령이 재촉했다. 정색하고 내 의견을 말했다. “자유시장경제에서 주식투자는 투자자가 알아서 하는 겁니다.” 그러자 노 대통령이 반문했다. “변 실장은 평생 빚쟁이한테 시달려 본 적이 있나요. 뭣도 모르고 빚내서 투자했다가 나중에 길거리에 나앉고 빚쟁이한테 시달리면 얼마나 고달픈지 아나요.” 그러고 보니 나는 어릴 때부터 먹고 사는 데는 걱정이 없었다. 국민의 다수가 농민이었던 시절 아버지가 공무원인 덕분이었다.

오래 못 간 코스피 2000시대

6월 19일 국무회의가 열렸다. 전날 코스피 종가는 사상 처음으로 1800선을 넘었다. 노 대통령이 강하게 말했다. “개인이 어디서 돈을 빌려 투자하는 것인지 체계적인 조사가 필요합니다.” 그 자리에는 나도 있었다. 한덕수 총리와 상의했다. 당장 무슨 조치를 하기는 어려우니 총리가 증시에 대해 한마디 경고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장관보다 총리가 나서는 게 무게감이 있을 것으로 봤다.

국무회의 사흘 뒤 한 총리는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증권사에서 개인들이 신용대출을 받아 투자한 액수가 5조원에 달하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입니다. 신용 투자에 신중하고 자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로선 증시에서 큰 뉴스가 됐다. 노 대통령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알겠다는 반응이었다. 한 총리 발언 이후 잠시 주춤하던 코스피는 7월에 사상 처음으로 2000선을 넘어섰다. 하지만 코스피 2000시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 후에도 노 대통령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라고 여러 차례 지시했다. 나는 금융과 부동산 전문가들을 불러 회의를 열었다. 혹시 위기가 발생해 집값이 폭락한다면 어느 정도 수준일까 물었다. 그때 전문가들이 제시한 최악의 경우 집값 하락률은 30%였다. 미리 대비하기 위해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를 제2금융권까지 확대했다.

암행 감찰로 은행 대출 실태 조사

당시 금융회사들은 덩치 불리기 경쟁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금융감독위원회와 금융감독원에 금융회사 대출 창구를 철저하게 감독하라는 뜻을 전했다. 저축은행도 미리 점검하도록 지시했다. ‘문제없다’는 식으로 보고가 올라왔다. 그런데 미심쩍은 부분이 적지 않았다. 김대기 청와대 경제정책비서관을 시켜 현장에 암행 감찰을 나가기도 했다.

8월에 윤증현 금감위원장 겸 금감원장이 3년 임기를 마쳤다. 대통령 임기가 6개월밖에 안 남은 시점이었다. 대통령 뜻을 잘 아는 김용덕 청와대 경제보좌관을 후임으로 추천했다. 남은 6개월이라도 더욱 철저하게 금융회사들을 감독해야 한다고 봤다.

당시 야당은 노 대통령을 ‘경포대’(경제를 포기한 대통령)라고 공격했다. 나는 인위적인 경기 부양을 거부하고 체질 개선에 주력한 ‘경우대’(경제를 우대한 대통령)였다고 말하고 싶다. 만일 노무현 정부가 임기 말에 선거를 의식해 무리한 경기 부양책을 썼으면 어떻게 됐을까. 금융위기의 충격은 우리가 실제 겪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을 것이다. 견실하게 경제 정책을 운용하면서 위험 요인을 미리 점검한 게 천만다행이었다.

무리한 경기 부양책은 마취제와 같다. 5년 단임 대통령은 마취제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YS(김영삼)도, DJ(김대중)도 임기 말에는 인위적인 경기 부양의 후유증으로 굉장한 어려움을 겪었다.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억지로 부양을 하면 반드시 그만큼 골이 깊어진다. 앞으로 누가 대통령을 하든지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이다.

정리·대담=주정완 논설위원, 이정재 전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