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 '스카팽' 배리어프리 버전에서 호흡을 맞춘 주연 배우 이중현오른쪽), 수어통역사 최황순씨가 5일 서울 명동 예술극장에서 포즈를 취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스카팽’의 수어식 이름은 ‘모자 쓴 남자’(엄지와 검지로 모자챙을 잡는 손모양)죠. 실제 농인 배우가 보곤 역대 배리어프리(장애인도 즐길 수 있도록 수어통역, 음성해설, 자막 등을 제공하는 것) 버전 중 배우 연기와 수어 호흡이 가장 완벽했다더군요.”(최황순 수어통역사)
“동선도 많고 합도 많이 맞춰야 하는 연극이라 처음엔 기존 공연과 관람 차이가 크면 어쩌지, 두려웠어요. 첫 회 공연을 하고 관객들은 똑같이 즐긴다는 걸 느낄 수 있었죠.”(배우 이중현)
지난 5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난 연극 ‘스카팽’(연출‧각색 임도완) 주연 배우 이중현(39)과 최황순(49) 수어통역사의 말이다.
올해 세번째 시즌을 맞은 ‘스카팽’은 17세기 프랑스 희극 작가 몰리에르(1622~1673)의 원작이 토대. 사랑하는 여인을 따로 둔 재벌가 아들들이 부모가 정한 정략결혼을 막기 위해 꾀 많은 하인 스카팽과 계략을 꾸미는 소동극이다. 2019년 초연 이래 '국립극단에서 가장 웃긴 연극'으로 이름나며 이듬해 재연, 지난 10~11월 지방 투어까지 열띤 호응을 얻었다.
명동예술극장에서 지난달 23일 막을 올려 이달 25일까지 공연하는 시즌3는 처음으로 총 3회차(지난달 26~28일)의 배리어프리 회차를 도입했다. 6명의 수어통역사가 11명의 배우와 함께 무대에 올랐는데, 일반 회차 못지 않게 객석이 꽉 찼다.

국립극단 희극 '스카팽' 배리어프리 버전은 지난달 26~28일 총 3회차 공연됐다. 한국 수어 통역 6명이 직접 무대에 올라 각 배역의 수어 통역을 맡고, 음성 해설과 한글 자막도 함께 제공됐다.맨왼쪽이 황 통역사, 가운데가 이중현씨다. 사진 국립극단
‘스카팽’은 정치인 성대모사, ‘땅콩 회항’ 등 시대상을 랩까지 동원해 리듬감 있게 표현한 대사와 애드리브, 아크로바틱을 방불케 하는 배우들의 몸짓과 의자 등 소품까지 척척 맞는 합이 특징이다. 그런 만큼 수어통역사들이 함께하는 배리어프리 버전은 동선 짜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몰리에르를 본뜬 동명 캐릭터를 제외하고 얼굴에 흰 분칠을 한 배우들과 어울리게 분장 및 복장까지 갖췄다.
구리‧거제‧제주‧대전 지역 투어 일정 때문에 배리어프리 버전을 위해 주어진 연습 시간은 단 2주. 초연부터 스카팽 역을 맡아온 이중현 씨는 “수어통역사가 들어오면 기존 합을 유지할 수 있을지, 어디에 배치해야 할지 걱정도 많았다. 임도완 연출, 배우들과 고민 끝에 통역사도 배우처럼 같이 등장시키기로 했다”고 돌이켰다.
황 통역사는 “기존 배리어프리 공연은 저희가 동선을 짜서 연출에게 제안해왔지만 ‘스카팽’은 공연팀이 같이 만들어주셔서 결과적으로 배우와 가장 싱크로율이 높았다”고 했다.
‘스카팽’ 배리어프리 버전은 첫 장면부터 관객에게 ‘마법’을 건다. 몰리에르를 본뜬 동명 캐릭터와 함께 등장한 전담 수어통역사가 수어 통역 뿐 아니라 몰리에르와 지팡이를 주고받으며 마치 그의 조수처럼 연기를 한다. 수어통역사들을 무대에 자연스럽게 있게 하기 위한 임 연출의 묘안이었다. 다른 수어통역사들도 배우의 그림자가 되어 소품 의자를 나르거나, 극중 연극의 관객처럼 자리하며 볼거리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25일까지 공연하는 국립극단 '스카팽' #수어통역 6인 배리어프리판 3회차 출연 #주연 이중현 "시각장애인 안내견도 관람 #함께 하는 뿌듯함 컸죠…시도 늘었으면"
이씨는 “‘스카팽’은 배우들끼리도 축제처럼 공연하는 행복한 작품이다. 공연 중 관객들 눈을 보게 되는데, 장애인‧비장애인 관객들이 함께 흥미롭게 봐주셔서 뿌듯했다”면서 “배리어프리 둘째날은 객석에 시각장애인과 안내견이 있었는데 배우들이 ‘야!’하면서 등장할 때 놀라는 게 귀여워서 저희도 모르게 시선이 집중됐다. 비장애인 관객들도 공연을 장애인들과 함께 즐길 수 있다는 점에 대해 느낀 바가 많았다고 하더라. 이런 시도가 더 많아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1997년 민간 수화통역사 자격증 시험 1기로 합격하며 이듬해 활동을 시작한 최 통역사는 2020년 김홍남 수어통역사와 함께 방송‧강의‧행사‧문화예술콘텐트‧교육 분야를 아우르는 공인수어통번역 회사 ‘잘함’을 설립한 후 배리어프리 공연 참여가 부쩍 늘었다고 했다.
1년에 두세 편 하던 것이 10편으로 늘었다.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 공연이 활성화하면서 수어통역 및 자막 제공 공연 영상물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2016년부터 한국수화언어법(한국수어가 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지닌 고유 언어임을 밝히고 사용자의 언어권과 삶의 질 향상을 목적으로 제정된 법)이 시행된 것에 더해, 자발적으로 배리어프리 버전을 만드는 문화콘텐트업계 관계자들이 늘어난 것도 배리어프리 버전 증가에 한 몫을 했다고 그는 설명했다.

연극 '스카팽' 배우 10인과 6명의 수어통역사가 피날레를 장식하는 장면. 실제 공연 음악을 실시간 연주하는 음악감독까지 총 17명이 무대에 올랐다. 사진 국립극단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국립극단만 해도 지난해 ‘로드킬 인 더씨어터’ 공연 전회차에 배리어프리 서비스를 제공한 데 이어, 장애와 예술을 주제로 한 작품 개발 사업 일환으로 장애‧비장애 배우가 함께 출연하는 ‘이것은 어쩌면 실패담, 원래 제목은 인투디언노운’ ‘커뮤니티 대소동’ ‘소극장판-타지’ 등을 개발하기도 했다.
올해는 ‘기후비상사태:리허설’ ‘앨리스 인 베드’ ‘세인트 조앤’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 ‘서울 도심의 개천에서도 작은발톱 수달이 이따금 목격되곤 합니다’ 등에 수어통역‧한글자막을 제공했다.
최 통역사는 "아동극 배리어프리 버전도 늘어나는 추세"라며 “서로 대화가 힘든 청인 부모와 농인 자녀 또는 그 반대의 가정을 돕기 위해 수익이 생기지 않아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수어는 시각어여서 관념적 연극일수록 통역이 어렵다. 배우의 감정과 대사 크기를 수어로 정확하게 전달하려 노력한다”면서 “장애인도 연극을 즐길 수 있는 저변이 확대될 수 있도록 더 다양한 장르, 다양한 극단 작품으로 배리어프리 공연 선택지가 늘어나면 좋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