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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키우고 책도 만드는 제주 책방들…인문정신 함양의 현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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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인문정신 〈중〉 질문하고, 연결하고, 성장케 하는 인문학

지난달 23일 제주도 김녕해변 인근에 위치한 서점 '이야기가게 일희일비'가 주최한 '가을 책 수확하기' 워크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쓰고, 양장 표지도 직접 만들어보는 사람들. 김정연 기자

지난달 23일 제주도 김녕해변 인근에 위치한 서점 '이야기가게 일희일비'가 주최한 '가을 책 수확하기' 워크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쓰고, 양장 표지도 직접 만들어보는 사람들. 김정연 기자

"책이 이렇게 어렵게 만들어지는구나, 처음 알았어요."

지난달 23일, 제주도 김녕에 있는 서점 '이야기가게 일희일비'에서 열린 '가을 책 수확하기' 워크숍. 6명의 참가자들은 풀칠을 하고 모서리를 매만지며 책에 씌울 양장 커버를 직접 만들고 있었다. 이틀 전 몇 시간에 걸쳐 쓴 자신의 책에 씌울 표지다.

 김정연 기자

김정연 기자

이들은 모두 제주에 사는 젊은이들이다. 워크숍을 계기로 처음 만난 이들은 줄곧 책을 쓰고 만드는 이야기만 했다. 이틀 전 처음 모여 한지안(38) 대표가 알려주는 대로 자신에게 의미있는 장면을 찍은 사진을 고르고, 자신의 생각을 글로 풀어내고 추리는 시간을 거쳐 얇은 책 분량의 원고를 완성해둔 상태였다. 이날 양장 커버를 직접 만들어 씌운 이들의 책은 2부 씩이다. 1부는 각자 챙겨가고, 1부는 책방에 기록용으로 남았다. 책과 멀어진 것처럼 보이는 시대지만, 누군가는 이처럼 책을 더 가까이 만나기도 한다.

제주도 지도에서 '서점'을 검색한 결과. 네이버지도 캡쳐

제주도 지도에서 '서점'을 검색한 결과. 네이버지도 캡쳐

2022년 현재, 책이 삶과 어우러지는 현장을 가장 또렷하게, 자주 볼 수 있는 곳은 제주도다. 제주에는 몇 해 전부터 스멀스멀 책방들이 모여들었다. 서울에서 책방을 운영하던 가수 요조도 제주에 '책방무사'를 열었고, 성균관대 앞 인문책방 '풀무질'도 제주도에서 다시 문을 열었다.

한국서점조합연합회에 등록된 제주도의 지역 서점은 81곳으로, 인구 8374명 당 1곳 꼴이다. 등록된 지역 서점이 485개 있지만 1만 9471명당 1개 꼴인 서울, 2만 1943명당 1개 꼴인 인천에 비해 두 배 이상 빽빽한 밀도다. 협재 해수욕장의 명소로 꼽히는 '만춘서점'을 필두로 여러 책방이 유명해지면서, '제주 책방 투어'가 속속 생겨났다. 제주도 내 책방들이 자체적으로 열던 축제 '책섬(썸:)'에 이어 올해는 제주문화예술재단 주최의 '문화예술섬 제주 위크' 축제도 처음 열렸다. 제주도 내 '책방 생태계'가 형성된 것이다.

질문 주고받는 통로 '시', 생각과 소통이 삶을 바꾼다 

 시타북빠 천장에는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온다' 등 김수영 시인의 시 구절 7개가 타이포그래피로 찍혀있다. 김정연 기자

시타북빠 천장에는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온다' 등 김수영 시인의 시 구절 7개가 타이포그래피로 찍혀있다. 김정연 기자

이 책방들은 단순히 책을 파는 데 그치지 않는다. 책을 매개로 이야기를 나누고, 지역 주민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고, 저마다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책방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제안한다. 올해 6월 말 구좌읍에 문을 연 '시타북빠'는 통화연결음으로 시를 읽어주는 등, 시를 키워드로 내세운 인문학 책방이다. 서점 건물 위층에서 운영하는 북스테이 '마음스테이' 중 '시의 방'을 예약하면 방 안에 놓인 시집 한 권이 손님을 맞는다.
황경아(54) 시타북빠 공동대표는 "삶의 전환기, 어려움에 빠졌을 때 시는 붙들고 살 만한 무언가가 될 수 있다"며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질문이 없고, 질문을 주고받을 소통의 통로도 없는 세상에서 인문학을 매개로 질문하고, 연결하고, 성장하고, 전환되고, 초월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문학·책에서 더 나아가 각자의 이야기를 꺼내는 연습을 책방에서 하기도 한다. 제주시 '한뼘책방'에서 '한뼘라디오' 워크숍을 진행한 장혜령 작가는 "일상에서 타인과 내가 너무 다른 목소리를 갖고 있을 때, 각자의 목소리로는 온전한 대화를 하기가 어려울 때가 있다"며 "어떻게 더 나은 대화로 풀어갈 수 있을까 궁리하다가, 라디오(팟캐스트)를 매개로 소통하면 어떨까 라는 생각에서 한 주제를 놓고 이야기하는 시간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종달리에 위치한 '책약방'은 종달 초등학교 학생들이 쓴 동시집과 종달리 해녀들의 이야기를 쓴 책을 전시한다. 같은 동네의 '소심한 책방'과 함께 종달리 토박이들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는 '세대를 잇는 이야기 유랑단'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책약방 양유정 대표는 “종달리 마을을 둘러싼 기억과 이야기들을 통해, 그들의 정신을 오늘의 젊은 세대와 함께 공유하고 싶었다"며 "종달리가 가진 소중한 유산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마음으로 다가서는 ‘사람-공간-세대’ 연결 프로젝트"라고 설명했다.

성균관대 앞 이름난 인문사회 서점이었던 '풀무질'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제주도로 내려와 '제주 풀무질'을 연 은종복 사장은 10여개의 작은 책모임을 꾸리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농사꾼들과 함께 농본주의에 대한 책을 읽으며 토론하는 모임이다. 은 사장은 "몸으로 하는 농사와 책을 같이 읽으면서 생각하는 농사가 다르다는 깨달음을 전한다"고 했다.

인문학, 인류가 남긴 모든 흔적과 만나는 일

이처럼 제주 곳곳의 동네에 자리잡은 서점은 일상생활 속 '인문학 허브' 같은 역할을 한다. '일희일비' 한지안 대표는 "책방을 연 것 만으로도 동네와 소통의 길이 열렸다"며 "'여기서 책을 만들 수 있나요?'라고 묻는 주민과 관광객이 진짜 많다. '내 책을 갖고 싶다' '내 이야기를 남에게 하고 싶다'는 열망을 가진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지 처음 알았다"고 말했다.

독서와 토론을 통해 타인의 생각과 이야기를 읽고 듣는 것 자체가 인문정신을 함양하는 일이다. 서울대 교육학과 신종호 교수는 "인문학은 사람에 대한 이해이자, 다른 사람의 생각을 만나는 일"이라 정의하며 "지금 사회는 책을 읽고 공유하는 활동이 너무 적은데, 인문 문화가 보편화될 수 있도록 여유 있는 삶의 가치를 강조하고 책 읽는 시간을 늘려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김헌 교수는 "인문학을 통해 인류가 세상에 남겨 놓은 모든 흔적들을 살펴보면서, '이렇게 살아야겠다'고 깨닫게 된다"며 "독서가 주는 지적 시뮬레이션으로 삶의 판단력을 더욱 키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중앙일보·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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