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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죽고 "혼자 살아 뭐해"…곡기 끊은 노인 살린 '가평의 기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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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경기 가평군 조종면 마일2리에 2017년 설치된 농약안전보관함을 보여주는 이순재 이장.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은 이 마을을 포함해 전국 11개 시군구 총 2000가구에 농약안전보관함을 보급했다. 사진 가평군 자살예방센터

경기 가평군 조종면 마일2리에 2017년 설치된 농약안전보관함을 보여주는 이순재 이장.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은 이 마을을 포함해 전국 11개 시군구 총 2000가구에 농약안전보관함을 보급했다. 사진 가평군 자살예방센터

 #“얼마전에 할머니 돌아가신 뒤론 할아버지가 집 안에 틀어박혀서 곡기를 끊었어요. 제가 계속 들여다보긴 하겠지만 걱정스러워요.”
경기 가평군의 A마을 이장은 최근 동네 할아버지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가평군자살예방센터에 알렸다. A마을 이장은 센터에서 자살예방 고위험군을 발굴하는 ‘생명지킴이’ 교육을 받은 뒤 항상 주변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장은 할아버지가 보름넘게 식사도 거의 하지 않고 외부와 단절된 채 지내는 모습을 보면서 이상 징후라고 느꼈다. 그는 교육받은대로 센터에 지원 요청을 했다. 이후 상담직원이 할아버지를 찾았다. “혼자 이렇게 살아 뭐해. 그냥 죽고만 싶어” 할아버지는 처음엔 대화 자체를 거부했지만 상담직원이여러차례 노력을 기울인 끝에 말문을 열었다. 할아버지는 우울감이 높고 자살 생각에 빠져있는 상태로 진단됐다. 이후 센터 측은 치료를 연계하고 민간 지원을 연계했다. 이장을 비롯 동네 주민들의 살가운 방문이 이어졌다. 몇달 만에 할아버지는 우울감을 이겨내고 일상을 회복했다.

생명 그 소중함을 위하여

#“좀 전에 아랫집 아저씨가 번개탄하고 소주를 사갔거든요? 아저씨 표정이 어두워 걱정되네요. 잘 살펴봐주세요.”
가평군의 B마을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점주는 최근 이웃 주민에게 이렇게 전했다. 당시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날씨였는데 번개탄를사들고 나간 이웃의 60대 남성이 이상해보였다. 평소 알고 지내긴 했지만 당사자를 붙들고 “왜 이런걸 사가느냐” 묻기는 어려워 이웃에 살펴봐달라 부탁을 했다. 이 가게는 가평군 자살예방센터에서 지정한 ‘생명사랑 실천가게’였다. 이들 가게 점주는 번개탄 구매자를 눈여겨 보고 자살 시도자로 의심될 경우 적극적으로 자살예방활동을 하도록 주기적으로 교육을 받는다. 번개탄을 사간 남성은 몇시간뒤 집에서 자살 시도를 했으나 점주와 이웃의 신고로 목숨을 건졌다.

경기도 가평군은 지자체와 민간이 자살자를 줄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협력한 덕분에 전국에서 자살 예방 정책을 가장 잘한 지자체 1위로 꼽혔다.
6일 국회자살예방포럼ㆍ생명보험사회공헌위원회ㆍ안전실천시민연합(안실련)에 따르면 전국 229곳 시ㆍ군ㆍ구의 자살률ㆍ조직ㆍ예산ㆍ사업 등을 평가한 결과 경기 가평군은 총점 79.2점(만점 100점)을 받아 1위에 올랐다.

가평군은 지난해 평가에서 전체 15위였는데, 이번에 1위로 올랐다. 가평군은 자살률을 8년 만에 절반으로 줄였다. 2013년 10만명당 자살 사망자 44.9명에서 2020년 20명대로 줄였고, 지난해에는 19.4명까지 떨어트렸다.
가평군은 경기도 내 두 번째로 면적이 넓고, 인구는 6만여명에 불과하다. 도시와 농촌이 함께한 지역이면서 외지인이 많이 찾는 관광지이고, 노인 비율이 25%에 육박한다. 민경희 가평군 정신건강복지센터 팀장은 “한때 경기도 내 자살률 1위였는데, 지자체장의 의지와 민간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지역 맞춤형 자살예방정책을 추진하면서 결실을 보게 됐다”라고 말했다.

그는 “군청에서 2시간 걸리는 마을도 있어 군청ㆍ보건소의 노력만으로는 역부족이다”라며 “민간 도움이 절실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고, 126개 리에 자살 고위험군을 찾아내기 위한 게이트키퍼(생명지킴이)를 양성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라고 말했다. 민 팀장은 “각 마을 이장, 부녀회장, 노인회장, 라이온스클럽 회원 등에 집중적으로 교육하고 동네에서 자살위험군으로 우려되는 이들을 발견하면 센터에 알리고 지원을 연계하도록 시스템을 만들었다”라고 덧붙였다. 번개탄 판매점주 대상 자살예방교육을 주기적으로 했고, 농촌 마을에는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과 연계해 농약을 넣고 열쇠로 잠그는 보관함을 설치하는 시범사업을 했다. 이순재 이장(조종면 마일2리)은 지난 2017년 앞장서 마을에 농약보관함을 설치했다. 이 이장은 “농사짓는 마을이다 보니 이전에는 가정집 선반에 농약이 놓여있곤 했는데, 이젠 꼭 필요할 때만 열쇠로 열어서 꺼낸다”라며 “사람이 살다 보면 충동적으로 나쁜 마음을 먹을 수 있는데 그런 위험을 없애주니 고마운 일이다”라고 말했다.

가평군에 이은 우수 지자체 2위는 충남 부여군, 3위는 강원 홍천군이다. 송혜린 부여군보건소 생명사랑팀 주무관은 “남성과 노인 자살률이 매우 높은 지역이었는데 이들은 자살예방 프로그램 참여도가 낮은 편이었다. 미술치료ㆍ음악치료 등 자살예방 프로그램에 남성 참여를 집중적으로 독려한 효과가 나타나는 것 같다”라고 전했다. 부여군은 지역농협 지원으로 농약보관함을 6000여개 설치했는데 이후 농약 관련 사고가 현저히 줄었다고 한다.

이번 평가는 인구 규모에 따라 세 그룹으로 나눠 이뤄졌다. 5만명 미만 시ㆍ군ㆍ구 중에는 강원 양구군이 1위를 차지했다. 이어 경기 연천, 강원 양양, 충남 청양, 경북 군위 순이다. 5만~30만명 미만 그룹에서는 경기 가평군이 1위, 충남 부여, 강원 홍천, 충남 태안, 경기 포천이 뒤따랐다. 30만명 이상은 서울 성북, 경기 안산, 경기 하남, 경기 김포, 경기 평택 순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지자체 229곳의 자살예방 예산은 513억7240만원 정도로 전체 예산(237조원)의 0.022% 수준에 그쳤다. 경기도가 지자체 평균 4억2900만원을 사용해 가장 많았다. 이어 충남(3억2800만원), 서울(3억1500만원) 등이었다. 전남은 지자체 평균 1억1100만원을 자살 예방에 써 가장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자살예방정책을 실행에 옮기는 조직도 지자체마다 편차가 컸다. 지자체 외부에 정신건강복지센터를 따로 운영하는 지자체가 202개(88.21%)로 가장 많았다. 내부에 조직을 별도로 둔 곳은 87개(37.99%)였다. 전문적인 인력을 갖춘 자살예방센터를 꾸린 곳은 38개(16.59%)에 그쳤다. 내ㆍ외부 어디에도 자살 예방 관련 조직이 없는 곳은 11곳이었다.

이윤호 안실련 안전정책본부장은 “장기간의 코로나 사태, 경기 악화로 자살자가 증가하고 있다”라며 “지자체의 자살 예방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투자가 절실하다”라고 강조했다.
※중앙일보·안실련·생명보험사회공헌위원회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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