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더 차이나 중앙시평

화성 17호, 김주애 그리고 중국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김병연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장

김병연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장

지난 11월 18일 북한은 화성 17호라 불리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시험 발사했다. 이 자리에 김정은은 김주애로 추정되는 그의 딸을 동행해 주목을 받았다. 2018년 김정은은 마이크 폼페이오 당시 미국 CIA 국장에게 “내 자녀들이 평생 핵무기를 이고 사는 것을 원치 않는다”라고 말했다. 여느 부모처럼 그도 자녀들이 전쟁의 고통 없이 평화롭게 살기 바랄 것이다. 그런 그가 4년 후엔 9세 정도의 어린 딸을 핵탄두 장착이 가능한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장에 데리고 온 것이다. 자신의 이전 말을 뒤집고 부모의 성정마저 거부한 김정은의 절박한 의도는 무엇일까. 그는 누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일까.

미사일 발사 때 딸 대동한 김정은
자녀들을 위해 경제난 견디란 뜻
핵은 북한 미래를 파괴할 뿐인데
핵실험 땐 셋 다 데리고 올 셈인가

독재 권력을 지탱하는 힘도 주민의 지지다. “정치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마오쩌둥의 주장이 단기엔 맞을 수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많은 사람을 총으로만 다스릴 수 없다. 결국 독재자도 주민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특히 경제난으로 주민 지지가 하락할 때는 더욱 그렇다. 현재 북한 주민의 소득은 2016년 대비 40% 가까이 감소한 것으로 보인다. 주 소득원이었던 시장 활동과 외화벌이, 밀수 등이 제재와 코로나로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2016년에는 4인 가족의 월 중위소득이 40달러였지만 현재는 30달러 미만으로 떨어졌다. 게다가 쌀과 옥수수의 가격은 2016년 초와 비교해 각각 20%, 50% 올랐다. 이렇게 생계유지가 힘들면 핵과 미사일 개발에 불만을 품는 주민이 늘어난다. 핵 개발 때문에 제재를 받아 경제난이 초래됐다는 인식과 함께 핵 대신 경제에 돈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주민 사이 누룩처럼 퍼지는 것이다. 김정은은 이 불만을 가라앉혀야 했다.

미래세대를 상징하는 딸을 미사일 발사장의 주연으로 출연시킨 최대 목적은 주민 설득에 있다. 핵과 미사일 개발은 미래세대를 지키기 위한 것이니 부모들은 자녀를 위해 지금의 경제적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은 것이다. 이는 자녀를 외침(外侵)에서 안전하게 보호하는 핵이 얼마나 중요한 무기인지를 감성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려는 고도의 정치 연극이다. 또 화성 17호 발사를 딸에게 보여주는 자신만큼이나 주민도 큰 자부심을 느끼라는 독려다. 그리고 은연중 자신도 자녀가 있는 보통의 아버지임을 각인시킴으로써 핵 개발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녀가 있는 모든 북한 주민을 위한 결정임을 내비치려 한다.

김주애를 등장시킨 또 다른 의도는 핵 포기 불가를 대외적으로 천명하는 것이다. 이는 지난 9월 북한의 핵 무력 법제화와 같은 맥락이다. 법제화가 핵을 협상 대상에서 제외하겠다는 공식 표명이라면, 김주애의 출현은 가족을 위해서 핵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김정은의 사적인 선언이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핵 보유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 국제사회에 알리려 한다. 어린 딸까지 데리고 와서 핵 보유 의지를 밝힌 만큼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지 않는 미국과는 대화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내심으론 비핵화에 대한 합의 없이 핵 군축만 논하는 협상을 미국이 제안하기를 바라고 있을 듯하다.

김주애의 깜짝 등장은 김정은이 다급하다는 암시다. 정치적 쇼에 딸을 끌어들여 핵의 가치를 선전해야 할 만큼 상황이 어렵다는 고백이다. 무엇보다 경제위기를 반전시킬 방도가 없다. 밀수 금지를 풀고 시장 활동을 장려하면 어느 정도 도움이 되겠지만 이로 인한 사회적 해이가 염려된다. 국제사회의 제재에 대항해 자력갱생을 주창한 만큼 남한의 인도적 지원을 받기도 어렵다. 경제가 숨이라도 쉬려면 북·중 경제 관계가 코로나 사태 이전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중국의 방역 정책으로 그 시점이 계속 미뤄지고 있다. 이런 불확실성 가운데 경제가 얼마나 버텨줄지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불만을 사상통제로 억누르고 있지만 언제 뚜껑이 열리게 될지 초조할 것이다.

시진핑 체제의 불안정도 김정은의 걱정거리다. 중국의 경직적 경제운용과 제로 코로나 정책은 성장과 일자리 창출을 저해하고 있다. 사회주의 현대화의 핵심인 공동부유(共同富裕)가 성공한다면 노벨상을 받을 만큼의 업적이 되겠지만 그 확률은 영에 가깝다. 더욱이 미·중 갈등은 중국 경제에 중요한 제약요인이 되고 있다. 이런 여건 때문에 중국 사회는 안정보다 불안정해질 가능성이 크다. 만약 내부 문제가 심각해진다면 중국은 북한을 챙길 여유를 갖기 어렵다. 더 큰 문제는 코너에 몰린 중국이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북한을 거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런 중국에 전적으로 기대야 하는 북한의 취약성이 김주애를 발사장에 불러들인 근인(根因)이다.

핵은 북한의 미래가 될 수 없다. 오히려 북한의 미래를 파괴할 뿐이다. 북한 청년들이 국제사회에서 마음껏 꿈을 펼칠 기회를 박탈하는 잔인한 무기다. 당장 먹고살기도 힘든 주민들에게 계속 참으라고 요구하기 위해 김정은은 한 자녀를 정치 선전의 도구로 삼았다. 그럼 다음 핵실험 때는 세 아이 모두를 데리고 나와 지켜보게 할 작정인가. 그다음은 무엇인가.

김병연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