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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의 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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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원영스님 청룡암 주지

원영스님 청룡암 주지

차고 고요한 시간, 부처님 전에 향을 사루니 코끝을 타고 향 내음이 훅 번진다. 때마침 처마 끝 풍경 소리도 바람에 일렁이며 법당의 고요함을 뚫고 호젓하게 울린다. 비록 도심 속 암자여도 이만하면 마음까지 넉넉해지는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가사장삼을 반듯하게 수하고 찹찹한 좌복에 엎드려 이마를 내려놓으니, 감사의 마음이 절로 난다.

어느덧 12월 마지막 달이다. 이렇듯 소박한 일상에선 감사할 일도 많으나, 스스로 물을 것 또한 많다. 1년 동안 잘 살았느냐고, 고운 심성으로 주위는 챙겼느냐고, 혹여 누굴 미워하다가 내가 긁히진 않았느냐고, 아닌 척 감추다가 상처가 곪진 않았느냐고, 인연은 잘 맺었느냐고, 또한 잘 끊었느냐고…. 묻고 싶은 것들이 이리 많으니 묻어두고 정리하고픈 것도 많다는 뜻이리라. 그중에서도 가장 애타는 심사는 아마 사람들과의 인연(因緣)일 것이다.

대체 인연이 뭐길래….

‘회자정리’ 새삼 새기게 되는 12월
얽매이지 말고 탁한 마음 비웠으면
아름다운 인연 마음에 그려보기를

도종환 시인은 ‘인연’이란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너와 내가 떠도는 마음이었을 때/풀씨 하나로 만나/뿌린 듯 꽃들을 이 들에 피웠다//아름답던 시절은 짧고/떠돌던 시절의 넓은 바람과 하늘 못 잊어/너 먼저 내 곁을 떠나기 시작했고/나 또한 너 아닌 곳을 오래 헤매었다...’

떠도는 마음이 풀씨로 만나 꽃을 피운다니 인연의 시작만큼은 참 곱다. 인연이란 단어가 좋은 이미지여서 그런지 누군가 “인연이야” 하면 금세 얼굴에 화색이 돈다. 이런 인연의 이치는 이미 불교에서도 많이 강조해왔다. 특히 ‘좋은 인연’을 가까이하라고, ‘칡도 소나무를 의지하면 높이 오를 수 있듯’ 스승이건 벗이건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선한 이를 가까이하라고 말이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었어도 누구에게나 삶은 힘겹다. 그러니 좋은 인연에 기대고픈 마음이야 당연하다. 마음을 나누어 서로에게 든든한 기둥이 되어주고, 그리움만으로도 세파를 이겨낼 힘을 준다면 그런 인연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인간사에 그리 좋은 인연만 맺으며 사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지만, 인생에서 좋은 인연은 손에 꼽힌다. 그마저도 만남이 있으면 꼭 이별도 있다. 나 또한 올해는 몇몇 인연을 끊어내었다. 업연(業緣) 같았던 묵은 인연도 정리했고, 화를 부르던 인연도 말끔히 비웠다.

사실 인연을 끊는다는 것은 큰 두려움이다. 더욱이 출가자는 인연을 맺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편하게 지내도 늘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거리를 두니 마음에 들인 인연의 수는 적은 편이다. 게다가 출가라는 것이 본디 출발부터가 인연을 끊어내고 시작하지 않는가. 그동안은 세상에 타협하고 적당히 비위 맞춰가며 사는 것이 훨씬 이롭다고 생각했다. 하나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내 마음이 맑지 못하고, 욕심에 휘둘려 초연하지 못한 탓이었구나 싶다.

일본에는 인연을 끊어주는 절이 있다. 잊고 싶은 사람뿐만 아니라, 담배 술 마약 같은 나쁜 습관까지 포함하여 악연을 끊어주는 절이다. 유학 시절 처음 친구들에게 인연을 끊어주는 절이 있다고 들었을 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용을 자세히 듣고는 이해가 됐다. 상처 입고 괴로운 사람들이 뭔가 확실하게 정리하고 새로 시작하고픈 마음에 찾아온다 하니 말이다.

『화엄경』에 이르기를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 모든 세간을 그려낸다(心如工畵師 能畫諸世間)’ 하였다. 내 마음먹기에 따라 인간관계의 그림도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다. 결국 인연이란 마무리를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날지 모를 그림이기도 하고.

생각해보면 인연의 끝은 헤어짐에 있지 않다. 마지막 원망까지도 마음에서 다 비워내고, 태연하게 안부를 물을 수 있을 정도여야 비로소 끝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분을 참는 것으로 끝을 보려 한다. 본인은 끝났다고 생각하겠지만, 글쎄…. 그러다 훗날 다시 만나면 가슴에 고인 말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세 치 혀로 칼을 휘두를지도 모른다. 그러니 참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참지 않아도 될 만큼 탁한 마음을 비워내야 한다. 물론 나이가 들면 이마저도 필요 없을 만큼 모든 것에 순응하며 살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생에 대한 애착이 강할수록 인간에 대한 애증도 쉬이 사라지지 않는 법.

‘잘 익은 상처에선 꽃향기가 난다’ 했던가. 복효근 시인의 말처럼, 인연을 잘 정리해야 꽃이든 열매든 얻지 않겠는가. 그러니 지난 일들일랑 이참에 다 정리하자. 고운 인연일랑 아름답게 이어가고, 썩은 인연 줄이거든 싹둑 잘라내자. 그리하여 새해엔 우리 모두 새롭게, 희망차게 다시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