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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한국바둑 증언하는 현현각의 귀중품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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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천상병 육필

천상병 육필

1968년 세워진 관철동 한국기원은 5층 건물이었다. 1층엔 다방, 2층엔 사무국, 3층엔 일반회원실, 4층엔 기사실, 5층엔 대국장이 있고 그 한켠에 현현각이란 바둑책 전문 출판사가 조그맣게 자리 잡고 있었다.

현현각은 조금 왁자지껄하고 환한 모습으로 떠오른다. 실물은 담배 연기 속으로 흐릿해지고 사진틀 안에 노란 색의 예쁜 방 하나가 보인다. 바둑기사 김인 국수와 바둑연구가인 안영이 선생이 그 방을 차렸다.

그 방의 또 다른 터줏대감은 시인 박재삼 선생. 바둑은 3, 4급 두었을까. 세상에서 제일 소박한 그는 부업으로 바둑 관전기를 썼다. 바둑기사 중에서는 속기의 명수 정창현 7단, 일본 유학파인 하찬석 9단, 조훈현 9단 등이 이 방을 출입했다. 언제부터인지 현현각은 한국기원에서 ‘양산박’으로 불렸다.

5·16 후 절필하고 낙향한 시인 신동문 선생과 ‘관철동의 디오게네스’로 불린 철학자 민병산 선생도 이곳에 왔다. 서봉수 9단은 어느 날 술자리에서 용기를 내 물었다. “기도(棋道)란 무엇인가요.”

서봉수는 평소 바둑에 도가 있다는데 그게 무언지 못내 궁금했고 꼭 물어보리라 다짐하던 터였다. 민병산 선생의 답변은 이랬다. “바둑의 길이지요.”

현현각에선 포도 딸 때가 되면 일손을 돕는다며 모두 단양에 내려갔다. 신 선생이 만든 3년 삭힌 포도주를 맛보며 대취하곤 했다. 가난하지만 따뜻한 현현각 시절이었다.

천상병 시인과 현현각의 인연은 좀 엉뚱한 데서 시작됐다. 오랫동안 행방불명 상태인 천 시인이 객사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천 시인의 유고집 발간을 위한 팀이 현현각에 꾸려졌다. 대학교수도 있고 시인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천 시인은 살아있었다.

깡마른 몸, 조그맣고 까만 얼굴이 떠오른다. 그 얼굴과 살짝 째진 눈에는 아무 감정이 없다. 한국기원 계단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바닥을 내민다. 오백원을 달라는 표시다. 처음엔 백원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며 오백원이 됐다. 근처엔 ‘꼬마집’이란 선술집이 있다. 돈을 받으면 그곳에 가서 막걸리를 마신다. 밥 대신 막걸리만 마신다.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는데 그 때문에 기억에서 과거의 모든 건 사라지고 막걸리만 남은 것일까. 몸은 더 마르고 얼굴은 더 까매져 간다. 어느 날 한국 문단의 제일 높다는 사람이 박재삼 시인을 방문했다. 천 시인에게 왜 오백원을 달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이런 핀잔이 돌아왔다. “내가 아무한테나 받는 줄 알어.”

현현각을 세운 안영이 선생은 바둑과 그 주변을 묵묵히 지켜보며 기록하고 수집했다. 『현현기경』 등 수많은 바둑책을 펴냈다. 부업으로 우리 고유의 순장바둑을 혼자 연구했고 『한국바둑사』를 썼다. 다양한 순장바둑판들을 수집했고 각종 바둑잡지는 창간호부터 빠짐없이 모았다. 대회 포스터나 옛 기보집, 기성 우칭위안의 친필 등 그의 수집품은 다양하다.

박재삼 시인과 천상병 시인의 육필원고도 있다. 백원을 꼭 갚겠다는 천상병 시인의 영수증은 실소를 자아내게 만든다. 천상병이란 휘호 아래 써놓은 “나는 살아있다” 글귀(사진)는 예리하게 가슴을 저민다.

은퇴한 지 오래됐고 가난한 살림이지만 안 선생은 단 하나의 소장품도 팔지 않았다. 사실 한국에서 예전 기록물이나 바둑 물품은 다 사라졌고 남은 게 별로 없다. 안영이 선생의 노력과 그의 소장품이 더욱 값진 이유다. 언젠가 바둑박물관이 세워져 이런 노고가 빛을 봤으면 좋겠다.

안 선생은 올해 88세. 박재삼, 신동문, 민병산, 김인, 천상병, 정창현 등 현현각 시절의 얼굴들은 저세상으로 떠나고 이제 안 선생만 남았다. ‘월간 바둑’에서 안 선생의 육성을 녹음해 기록으로 남기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다행이다. 바둑은 지금 온갖 도전 앞에서 살아남느라 바쁘다. 그러나 힘든 여정일수록 기억할 가치가 있는 것을 기억하고 간직해야만 한다. 그래야 무시당하지 않는다.

박치문 바둑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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