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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창립 이끈 시국사건 1호 변호사..."사서 고생하자" 큰 울림 [한승헌 1934~2022.4.2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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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 고생하는 사람이 됩시다. 이런 사람이 늘어감으로 해서 역사는 진보합니다. 약한 자에게 힘을 주고 강한 자를 바르게 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좀 더 사서 고생하는 그런 사람, 그런 변호사, 그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이 되었으면 합니다.”

지난 2018년 1월 30일 민변 창립 30주년 기념행사. 장내에는 한 원로 변호사의 말끝마다 웃음과 함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나왔다. 1988년 민변 창립을 주도한 ‘1세대 인권변호사’ 고(故) 한승헌 변호사(전 감사원장)의 발언 때다.

고 한승헌 변호사. 중앙포토

고 한승헌 변호사. 중앙포토

60년 가까이 민주화와 인권 신장에 기여한 한승헌 변호사가 지난 20일 저녁 9시쯤 별세했다. 향년 88세.

고인은 1934년 전북 진안군에서 태어나 전주고와 전북대 정치학과를 나왔다. 1957년 고등고시 사법과(8회)에 합격한 뒤 법무관을 거쳐 60년부터 통영지청·법무부 검찰국·서울지검 검사로 5년간 일했다. 1965년 검찰을 떠나 이후 군사정권 내내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시국 사건 1호 변호사’로 손꼽히는 고인은 소설 ‘분지 필화사건’(1965)을 시작으로 동백림 간첩단 사건(1967), 통일혁명당 사건(1968), 민청학련 사건(1974), 인혁당 사건(1975) 등 독재정권 서슬이 퍼렇던 70~80년대 수많은 시국 사건의 변론을 도맡으며 한복판에 섰다.

고인 자신 또한 1975년 ‘유럽 간첩단 사건’으로 사형당한 김규남 의원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썼다가 구속되고,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의 공범으로 몰려 투옥되기도 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감사원장을, 참여정부 때는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장을 맡는 등 사법 개혁과 법치주의 확립을 위해 애썼다.

고인은 ‘시대의 멘토’로서 굵직굵직한 국면마다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지난 2013년 고인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검찰개혁에 대해 “명실상부하게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하려면 집권자와 검찰 총수의 양심과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검찰 중립이 안되니까 공비처(‘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로 현 공수처와 유사)라고 고위공직자나 대통령 친인척을 수사하는 별도의 수사기관을 두자 하는데 그 기관이라고 해서 하루 아침에 공정무사한 검찰이 된다는 보장도 없고 옥상옥이 되기 쉽다”고 했다.

생전의 한승헌 변호사(왼쪽)와 노무현 대통령. 중앙포토

생전의 한승헌 변호사(왼쪽)와 노무현 대통령. 중앙포토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사법부 70주년 기념식에서 한승헌 전 감사원장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하고 있다. 한 전 감사원장은 권위주의 정부 시절 인권변호사로서 수많은 시국사건 변호를 맡는 등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위해 헌신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사법부 70주년 기념식에서 한승헌 전 감사원장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하고 있다. 한 전 감사원장은 권위주의 정부 시절 인권변호사로서 수많은 시국사건 변호를 맡는 등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위해 헌신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연합뉴스

2019년 주간지 인터뷰에서 문재인 정부의 검경 수사권 조정이나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신설 등 검찰개혁 추진에 대해 물을 때도 정파적 이익이 아닌 ‘국민인권’을 가장 우선시했다. 고인은 “‘경찰이 수사권을 어느 정도까지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가’, ‘그렇게 했을 경우 국민 인권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가’, ‘또 검찰이 모든 걸 지휘하고 결정하는 이른바 '검찰왕국'이 개혁될 수 있는가’ 등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민변 출범 30년 자리에서 고인은 민변이 생긴 독재정권 때 시민들의 기본권조차 수호하기 어려웠던 것과 시대상이 달라졌다고 언급하면서 이른바 ‘갑질’에 기생하는 강자들이 법조인 관심의 표적이 되어야 한다. 사회권적 기본권의 영역에 더욱 다가서야 한다는 시대적 소명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헌정 사상 초유의 대법원장 구속을 낳은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때는 언론 인터뷰에서 “문제가 생기면 파서 보고 밝혀내고 없애야 하는데, 덮고 매몰시키는 데 급급했다”고 짚었다. “(사법부가) 정권과 거래적인 성격으로 내통을 했다는 것은 유사 이래 처음”이라며 “치유하지 않으면 병균이 어디에선가 남아 있다가 또 머리를 들고 나온다”고 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에 대해서는 “법조계에서는 정말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우리들의 기대에는 못 미친다”고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지난 4월 21일 문재인 대통령이 서울 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한승헌 전 감사원장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사진 청와대

지난 4월 21일 문재인 대통령이 서울 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한승헌 전 감사원장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사진 청와대

문재인 대통령은 21일 오후 3시께 강남성모병원에 마련된 한 변호사의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한 변호사는 인권 변호사 출신인 문 대통령과의 인연도 각별했다. 고인은 2019년 한 언론 인터뷰에서 1975년 반공법 위반으로 서울구치소에 수감됐을 당시 시위를 하다 잡혀 온 한 학생에게 자신의 메리야스를 줬다면서 그 학생이 문 대통령이었다고 회상했다. 2018년 9월 '대한민국 사법부 70주년 기념행사'에선 문 대통령이 한 변호사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한 변호사의 별고 소식에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 박영선·설훈·우원식·조정식 더불어민주당 의원, 이용섭 광주시장,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김민웅 경희대학교 미래문명원 교수, 류영재 대구지법 판사 등 각계 각층의 애도도 잇따랐다.

고인의 장지는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 화장장은 양재 서울추모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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