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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경민의 이코노믹스

낚싯대부터 인공위성까지…탄소섬유수지를 잡아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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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미래 경제 이끌 첨단소재

김경민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김경민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30여년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였던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의 저자는 일본 도쿄도 지사로 이름을 날렸던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다. 미국에 대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노(NO)’라는 말을 쓴 최초의 경우라 할 수 있다. 이 책의 내용을 세밀히 살펴보면 탄소섬유로 만든 강화플라스틱(CFRP:Carbon Fiber Reinforced Plastic)이라는 말이 핵심인데, 이 물질 자체가 미·일 외교사에 크나큰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일본은 당시 F-2 지원전투기를 독자 개발 중이었는데 미국이 설계도를 보고 나서 아연실색하고 만다. 세계 최강의 전투기를 보유한 미국도 처음 보는 설계도였기 때문이다. 전투기의 좌우 날개를 탄소강화플라스틱을 사용해 복합 일체 성형기술로 통째로 찍어서 만든다는 것으로, 당시 미국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않은 기술이었다.

‘강하고 가볍다’ 글로벌 개발경쟁
일본 기업들이 세계시장 이끌어

우주항공·풍력발전 등 활용 무궁
2035년 시장규모 35조원에 달해

한국, 일본·미국 이어 3번째 개발
차세대 동력으로 키울 전략 필요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의 배경

결국 레이건 대통령이 나카소네 총리를 설득해 미·일 양국이 공동개발하게 되었다. 이시하라는 F-2 지원전투기를 일본이 독자 개발하지 않고 미·일이 공동개발하게 된 결과에 대해서 크게 분노했고, 『The Japan that Can say NO』라는 영문판까지 내며 나카소네 총리를 비판했다.

F-2 전투기 성능의 강점은 주날개의 소재인 탄소섬유 수지에 있었다. 강철보다 14배 이상 강하고 알루미늄보다 가벼운 탄소섬유수지 날개를 단 전투기는 회전력에서 다른 전투기를 압도했다. 그 당시 미국의 최고 전투기는 F-15였는데 최고 속도로 비행하다가 회전하려면 반경 5000m의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반면 탄소섬유 소재 날개를 사용한 일본의 F-2 지원 전투기는 1600m 공간이면 회전이 가능했다. 전투 상황을 가정하면 F-2가 한창 돌고 있는 미국 F-15의 꽁무니를 따라잡은 뒤 열추적 미사일로 F-15를 단번에 파괴하는 시나리오가 가능해진다. 이시하라의 책은 탄소섬유수지라는 물질의 중요성과 함께 미래 제조업의 핵심 소재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일반 대중에게 처음으로 알렸다.

그때가 1991년, 31년이 흐른 2022년 세계의 탄소섬유 시장은 일본 기업이 석권하고 있다. 도레이가 1위, 테이진이 2위, 미쓰비시 머티리얼이 3위를 차지하며 해외 기업들의 기술 추격을 용인하지 않고 있다. 4위는 미국이며 대만, 독일 등이 그 뒤를 잇고 있는데 시장점유율은 아직 미미하다.

보잉 787은 ‘메이드 인 저팬’?

F-2 전투기에서 시작한 탄소섬유수지는 민간분야의 상업용으로 활용되어 보잉사의 최첨단 여객기 보잉 787과 에어버스 350X의 날개와 동체 분야에 사용되고 있다. 보잉 787의 경우 주날개는 물론 동체에도 탄소섬유수지가 사용되고 있어 비행기 전체의 50%를 일본 도레이의 제품이 뒤덮고 있다. 아사히 신문은 보잉 787 여객기가 ‘메이드 인 저팬(Made in Japan)’이나 다름없다고 보도했을 정도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보잉 777의 신기종에도 50%가 넘는 탄소섬유수지를 사용해 중량을 줄이면서 기름값을 20% 낮추는 효과를 보고 있다. 일본 도레이는 상업성이 뛰어난 항공 우주 분야에 특화된 탄소섬유수지를 판매하고 있는 데 비해 2, 3위의 테이진과 미쓰비시 머티리얼은 자동차의 구조물과 풍력발전기의 블레이드를 주로 생산한다.

현재 세계의 탄소섬유 시장 규모와 활용 분야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시장조사 전문매체인 일본 후지경제에 따르면 탄소섬유수지 시장은 2021년 8만5790톤, 12조원 규모에서 연평균 10%씩 성장해 2035년에는 32만7430톤 규모, 총 35조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탄소섬유 수지의 활용도 측면(물량 기준)에서는 2021년 기준 풍력발전 블레이드(날개)가 39%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우주항공 분야가 15%로 2위다. 그  뒤를 이어 골프채와 같은 스포츠·레저 시장이 12%, 자동차가 7%를 차지하고 있다.

금액 기준으로는 2021년 우주항공이 32%, 풍력발전 블레이드가 25%, 스포츠와 레저가 11% 자동차 5%, 수소탱크가 2%다. 2035년이 되면 우주항공이 37%. 풍력발전이 17%, 자동차 11%, 수소탱크 7%로 전망된다.

소형인공위성 둘러싼 지구촌 경쟁

항공우주 분야의 탄소섬유수지 활용이 계속 증가하는 것은 선진 각국이 국익을 걸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과 무관치 않다. 게다가 세계가 위성통신 시대로 접어들면서 소형인공위성 발사가 급증하고 있는 것도 탄소섬유수지 수요를 늘릴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으로 스페이스X는 4만여 개의 소형위성으로 전 지구 인터넷 통신망을 구축하는 중이고, 플래닛 랩스(Planet Labs)도 150기의 위성으로 지구 총면적의 40%를 상시 관측하고 있다. 우주 분야 시장 조사 업체인 유로컨설턴트(Euroconsultant)는 2021~2030년 500㎏ 이하 소형위성 전체 수요를 총 1만3877기로 예상하고 있다.

이 같은 우주산업의 성장과 탄소섬유수지 수요 확대는 동전의 양면처럼 동시에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4년 전 일본 나고야에 있는 H-2A 로켓 제작공장을 방문했을 때다. 기립해 있던 로켓 상단부의 세로 1m 정도가 까만 색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미쓰비시 로켓부장에게 “저 까만 테두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탄소섬유수지”라고 대답했다. 로켓은 경량화 공정이 필수적이다. 가볍게 만들면 인공위성을 하나라도 더 실어 지구 저궤도에 올릴 수 있다. 외국의 인공위성을 쏘아 올려 주는 비즈니스의 경쟁 입찰에선 원가 경쟁력이 높아진다. 탄소섬유수지와 우주개발은 이미 필수불가결한 관계를 맺고 있다.

수소차·전투기·헬기 등에도 쓰여

그러면 한국의 사정은 어떤가.

우리나라는 효성첨단소재가 T-700급 탄소섬유수지를 생산하며 태양광 단열재, 골프채 등의 용도로 물량을 공급해왔다. 이어 지난 10월 T-1000급 탄소섬유를 개발하여 고품질이 요구되는 항공·우주 분야에 진출할 수 있는 기술발전을 이뤄냈다. 이 기술은 일본, 미국에 이어 세계 3번째 개발이다. 탄소섬유수지 분야의 선진국이 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이는 2017년 8월부터 산업통상자원부가 투자하여 국방과학연구소 민군협력진흥원의 부처연계 협력 기술개발사업으로 시작해 5년 만에 거둔 성과다. 효성첨단소재는 글로벌 3위, 시장점유율 10%를 목표로 2028년까지 탄소섬유사업에 총 1조원을 투자해 생산 규모를 연산 2만4000톤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수소를 연료로 쓰는 수소 자동차를 개발하고 있는 현대차도 탄소섬유산업 진출을 고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소차의 경우 연료탱크를 알루미늄으로 만들고 외벽은 탄소섬유수지로 둘러싸야 하는데, 향후 미래 자동차 생산에 이처럼 탄소섬유수지 활용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방위산업 분야에도 탄소섬유수지 사용이 늘고 있다. 무기 자체가 갖는 중량을 경량화함으로써 속도가 빨라지고 사거리도 향상되고 있는 것이 입증된 바 있다. 폴란드에 수출되는 FA-50의 꼬리날개 부분에, 차세대 전투기인 F-21 전투기의 주날개와 꼬리날개에 모두 탄소섬유수지가 사용됐다. 수리온 헬기의 날개와 탑승 문도 탄소섬유 수지로 제작한다.

정부·기업·학계 협력체제 갖춰야

탄소섬유수지는 이제 쓰이지 않는 제조업 분야가 거의 없을 정도다. 낚싯대, 골프채 등 레저용품은 물론 태양광 발전 시설, 풍력발전, 선박, 자동차, 군사 무기, 항공기, 인공위성, 로켓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반도체, 조선, 자동차 등 한국의 주력 산업은 현재 경쟁국들의 거센 도전과 추격을 받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한국산업의 새로운 성장동력 발굴이 절실하다. 첨단소재는 산업 경쟁력을 좌우한다는 점에서 차세대 동력이 될 수 있다. 탄소섬유수지가 좋은 사례다. 첨단소재에 대한 한국의 연구 인프라도 많이 탄탄해졌다. T-1000급 탄소섬유 개발 때 작동한 산자부-국방과학연구소-효성첨단소재 협력 모델도 있다. 정부와 기업, 학계가 함께 비전을 세우고 서로의 강점을 연계해 협력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탄소섬유수지 같은 첨단소재 시장을 한국이 주도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김경민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