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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억 놓고 생존 배틀…‘오겜’이 현실이 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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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웨이브 ‘버튼게임’(왼쪽 사진), 티빙 ‘보물찾기’ 등 거액의 상금을 내건 서바이벌 예능이 잇달아 제작되고 있다. [사진 웨이브·티빙]

웨이브 ‘버튼게임’(왼쪽 사진), 티빙 ‘보물찾기’ 등 거액의 상금을 내건 서바이벌 예능이 잇달아 제작되고 있다. [사진 웨이브·티빙]

두건으로 얼굴이 가려진 참가자들이 의문의 방에 도착한다. 곧이어 철제 침대가 규치적으로 배치된 합숙 공간이 이들의 눈 앞에 펼쳐지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진행자가 나타나 “당신도 5억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돈 가방을 찾으면 된다”고 게임의 룰을 설명한다.

상금 456억원을 두고 목숨을 건 게임을 벌이는 드라마 ‘오징어 게임’(넷플릭스)이 아니다. 이와 유사한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들이 줄줄이 등장하고 있다. 세부적인 설정에는 차이가 있지만, 거액의 상금을 손에 넣기 위해 모인 일반인 참가자들이 한 공간에서 합숙하며 돈을 향한 ‘처절한’ 생존 게임을 벌인다는 큰 틀의 포맷은 비슷하다. 이 같은 프로그램들의 등장은 가상화폐 열풍 등 한탕으로 인생 역전을 노리는 시대상을 반영하는 현상이지만, 돈 이외의 가치는 뒷전이 되는 물질 만능주의를 강화할 수 있다는 윤리적인 지적도 나온다.

지난 2일 첫 공개된 티빙 ‘보물찾기’는 참가자 24명이 전국 곳곳에 숨겨진 현금 5억원을 찾는 서바이벌 예능이다. 참가자 리스트에는 대기업 엔지니어, 변호사 등 다양한 직군의 일반인이 포함됐다. 프로그램을 연출한 채성욱 PD는 “돈에 대한 욕망이나 감정을 날 것 그대로 표출할 수 있는 사람들 위주로 뽑았다”고 밝혔다.

지난달 11일부터 웨이브가 선보인 ‘버튼게임’도 기본 포맷이 유사하다. 9명의 참가자가 14일간 밀폐된 공간에서 생활하며 하루 한 번 버튼 선택으로 1억원의 상금을 지키거나 잃는 생존 배틀을 벌인다. ‘오징어 게임’의 절박한 플레이어들처럼 ‘버튼게임’의 참가자들도 “집에 불이 나 전소됐다” “사기 피해 금액이 많다”는 등 각자 간절한 사연을 안고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넷플릭스가 공개 예정인 예능 ‘데블스 플랜’도 총 상금 5억원을 내걸었다. [사진 넷플릭스]

넷플릭스가 공개 예정인 예능 ‘데블스 플랜’도 총 상금 5억원을 내걸었다. [사진 넷플릭스]

넷플릭스가 제작 중인 ‘데블스 플랜’도 5억원 상금을 두고 7일 동안 두뇌게임을 펼치는 서바이벌 예능이다. 넷플릭스는 지난달 참가자 모집 공고를 내면서 ‘최대 5억원의 상금을 건 악마의 계획에 함께 하시겠습니까?’ 등의 문구를 내세웠다.

이같은 서바이벌 예능의 등장이 새로운 일은 아니다. 2013년 시즌1 방영 후 시즌4까지 방영된 ‘더 지니어스’(tvN) 시리즈와 ‘소사이어티 게임’(tvN) 등 서바이벌 예능은 꾸준히 제작돼 왔다. 하지만 기존 프로그램들이 문제를 풀어가는 참가자들의 지적·신체적 능력에 집중했다면, 최근 예능들은 일반 참가자들의 간절한 사연과 함께 거액의 상금을 부각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과거 최대 1억원 수준이었던 총상금 액수도 3억원(티빙 ‘제로섬 게임’, MBC ‘피의 게임’), 4억원(채널A ‘입주쟁탈전’)을 거쳐 최근 프로그램들에선 5억원까지 늘어났다.

단순한 게임 룰을 도입함으로써 출연자들의 원초적인 본능이 더 강조된다는 점도 달라진 양상이다. 하루에 한 번, 세 개의 버튼 중 하나를 누르는 방식(가장 소수 인원이 택한 버튼을 눌러야 상금 차감 면제)으로 상금을 지켜야 하는 ‘버튼게임’에서는 초반만 해도 참가자들이 협력하는 듯했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거짓말과 배신이 난무했다. 다른 참가자보다 먼저 돈가방을 찾아야 하는 ‘보물찾기’에서는 뒤따라오는 참가자를 일부러 잘못된 길로 유인하거나, 힌트를 조금이라도 빨리 얻기 위해 더러운 수조에 뛰어드는 일도 불사한다. 남성 참가자들이 여성 참가자들을 배제하거나 편을 가르는 장면도 등장했다.

이처럼 돈을 향한 욕망을 노골적으로 표출하는 예능은 물질 만능주의, 한탕주의가 팽배한 사회 분위기를 더욱 강화할 수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유현재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이런 프로그램 안에서는 타인과의 신의나 우정, 약자에 대한 보호 등은 모두 돈 앞에 의미 없는 가치로 치부된다”며 “과거에 비해 상금에 초점을 맞추는 식으로 포맷이 단순화되고 있는 점은 이런 사고방식을 공고히 하는 악순환을 낳을 수 있어 우려된다”고 말했다.

일반인 참가자들이 극한 상황에 내몰린다는 점에서 제작자들의 책임 있는 관리를 요청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김성수 대중문화평론가는 “예능 참가자가 출연 이후 정신적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사례가 국내외를 막론하고 되풀이되고 있다”며 “제작 과정에서부터 책임감을 갖고 신경 써야 한다”고 짚었다. 실제 ‘버튼게임’의 일부 출연자들은 촬영 도중 “빚쟁이들 모아 놓고 너무 잔인하다” “마음 약한 일반인 돈 준다고 유혹해 놓고 너무한다”며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김 평론가는 “‘오징어 게임’은 그 게임 자체가 반사회적 범죄임을 전제로 만들어진 드라마인데, 유사한 상황을 설정한 예능은 드라마가 비판적으로 다룬 자본주의의 극단을 실제로 재현한 셈”이라며 “더 가학적, 선정적으로 흐르지 않도록 방송 심의 등의 사회적 기능이 작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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