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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커지는 핵위협,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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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명자 서울국제포럼 회장·한국과총 명예회장·전 환경부장관

김명자 서울국제포럼 회장·한국과총 명예회장·전 환경부장관

지난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래 핵위협이 재연되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쿠바 미사일 위기 이래 최고조의 핵위협이라며 ‘아마겟돈’(지구 종말의 최후 전쟁)이란 표현까지 썼다. 지난달 G20 정상회의에서 미·중 정상은 우크라이나에서의 핵무기 위협에 반대한다고 합의했다. 그것으로 핵위기가 사라진 건 아니다. 포린어페어스지는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는 경우 핵을 사용할 것이라 전망했다. 중국은 “다른 나라에 먼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면서도 대만은 자국의 일부이므로 그 약속에서 제외된다고 밝힌 바 있다.

북한은 올해에만 10월까지 27차례 단거리 탄도 미사일을 발사했다. 5월과 11월엔 ICBM을 쏘았다. 이제 7차 핵실험은 기정사실로 되는 분위기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되자 국내에서는 NATO식 핵공유와 핵우산 강화, 전술핵 재배치에서 나아가 핵확산금지조약(NPT, 1970년 발효, 2022년 기준 가입국 191개국) 탈퇴와 자체 핵무장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참상 공포로 핵전쟁 피해 왔으나
우크라·대만·한국서 핵위협 재연
국제사회 핵위협 관리 노력 실패
현실적 대안, 한미 통합억제 강화

원자력의 실용화는 아인슈타인의 1905년 방정식 E=mc²에서 비롯됐다. 하필이면 전운이 감돌던 1938년 독일의 오토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은 우라늄-235의 핵분열 반응에 성공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공상과학 수준이었다. 자연계 우라늄의 99.3%는 우라늄-238이고 0.7%가 우라늄-235인데, 핵분열을 일으키는 우라늄-235의 분리방법을 알지 못했고, 핵분열 연쇄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임계질량 값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를 밝혀낸 것은 1940년 영국의 오토 프리쉬와 루돌프 파이얼스였고, 영국 모드(MAUD)위원회가 원자탄 제조 기초자료를 갖추게 된다. 그러나 독일의 로켓 V-2 발사 사정권에 들어 있는 터에 제조공장을 지을 수는 없었다. 영국은 모드 보고서를 미국으로 넘긴다.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의 진주만 폭격으로 미국이 본격 참전하고 코드명 ‘맨해튼 프로젝트’가 가동된다. 도대체 과학자들은 어째서 ‘사용할 수 없는 무기’ 개발에 나선 것일까. 전쟁을 종식하기 위해서는 원자탄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작용한 결과였다. 독일의 항복 이후 과학계에서는 투하 반대 운동이 일어난다. 그러나 펜타곤은 ‘조속한 전쟁 종식을 위해 사전경고 없이 일본에 투하’하기로 결정한다. 당시의 참상에 충격받은 맨해튼 프로젝트의 과학수석행정관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죄악이 무엇인가를 알았다”고 했고, NBC 라디오는 “프랑켄슈타인을 창조했다”고 했다.

1940년대 말부터의 냉전 시대는 미·소의 핵무기 경쟁으로 얼룩졌다. 1950년대 초 미·소가 수소폭탄 개발 경쟁에 나서고, 1957년 영국이 수소폭탄 실험 성공으로 ‘핵클럽’에 가입하면서 세계는 공포의 균형(Balance of Terror)시대로 진입한다. 1945년 7월 이후 2016년까지 핵실험은 2000여 차례 진행됐고, 미국·러시아·영국·프랑스·중국·인도·파키스탄·북한 8개국이 했다. 미국·소련·영국·중국·프랑스는 수소폭탄도 갖게 됐다. 21세기에 핵실험을 강행한 것은 북한뿐이다. 2016년 4차는 수소폭탄 실험이라고 발표했다.

그동안 핵위협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다. 1954년 성탄절에 버트런드 러셀 경은 ‘인류의 위험’ 방송에서 핵전쟁 위기 방지를 위한 국제회의 소집을 제안했다. 아인슈타인이 호응하면서 핵무기 폐기를 위한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이 나온다. 1991년 9월에는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이 전 세계 배치 전술 핵무기 철수와 폐기를 일방 선언하고, 미하일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이 이에 화답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2021년 세르히 플로히 하버드대학 교수는 저서 『핵전쟁 위기(Nuclear Folly)』에서 1962년 케네디와 흐루쇼프가 핵전쟁을 피해갔던 이유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경험하고 수소폭탄 실험으로 가공할 파괴력을 실감한 세대라서 핵전쟁의 극단적 최후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라 분석했다. 한국전쟁에서도 원자탄이 투하될 뻔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11월 기자회견에서 원자탄 사용을 검토하고 있다면서 이듬해 4월 원자탄 9발을 괌 기지에 배치했다. 그러나 실행하지는 않았다. 트루먼의 외손자는 할아버지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피해참상에 충격받아 한국전쟁에서 원자탄을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고 증언했다(2015년). 전략적으로는 한국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되는 것을 피하고, 잇달아 아시아에 투하하는 데 대한 부담이 작용했다는 해석이다.

국제사회는 핵위협 해소에 실패했다. 국제기구가 핵위협을 관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개 국가 차원의 핵위협 대처는 난중지난(難中之難)이다. 핵무기 관련 옵션은 어느 국가가 주장한다고 그대로 용인되는 사안이 아니다. 한국의 핵 보유는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설득한다고 예외로 인정될 리도 없다. 1, 2차 북핵 위기는 1993년 3월과 2003년 1월 북한의 NPT 탈퇴선언으로 일어난 비상사태다. 현재로서는 NPT라는 국제질서를 준수하는 선에서 한미 확장억제 수단을 보강해 강력한 통합억제 정책으로 발전시키는 길밖에는 묘수가 안 보인다.

김명자 서울국제포럼 회장·한국과총 명예회장·전 환경부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