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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연금 모셔라, 8%대 금리 내놨다 발 뺀 증권사들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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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기업의 자금줄이 막히는 이른바 ‘돈맥경화’에 금융당국의 입김이 거세지고 있다. 은행의 예금·대출 금리뿐 아니라 퇴직연금 시장에서도 금리 인상 자제령이 내려졌다. 금융당국은 ‘착한 관치’라는 입장이지만, 시장을 왜곡한다는 비판도 커지고 있다.

4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당국은 시중은행뿐 아니라 저축은행, 상호금융 등 대출 상품을 취급하는 금융회사들의 대출금리 상승 추이를 매주 살피고 있다. 단순 모니터링이라는 입장이지만, 금융권에서는 대출 금리를 올리지 말라는 압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예금금리는 금융당국의 개입 탓에 이미 뒷걸음질 쳤다. 금융당국은 지난달부터 공개적으로 은행에 정기예금 금리 인상 자제를 요청하고 있다. 시중은행의 정기예금 금리 인상이 대출금리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는 데다, 제2금융권의 유동성 위기가 심해질 수 있다는 이유다. 지난달 중순 5%를 넘어섰던 5대 시중은행의 정기예금 금리는 지난달 24일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0.25%포인트 인상(연 3 → 3.25%)에도 불구하고, 이달 들어 4% 후반대로 떨어졌다. 하나은행만 5%대 금리를 유지하고 있다.

퇴직연금 시장에서도 비슷한 주문이 잇따르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지난달 말 시중은행, 증권사, 보험사 등 총 90개 금융사에 12월 퇴직연금 금리를 결정할 때 운용 수익 등을 고려해 금리를 결정하라는 취지의 행정지도를 내렸다. 앞서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달 28일 ‘퇴직연금 머니무브’ 현상 등에 대해 “금융시장 특성상 쏠림이 생길 경우 금융당국이 일부 비난을 받더라도 역할을 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다”고 말했다.

퇴직연금 금리 과당 경쟁 자제령이 내려진 것도 돈맥경화 현상이 이유다. 퇴직연금 중 확정급여형(DB형)의 80%는 통상 12월 중 만기를 맞아 새로운 상품을 찾아 나선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한국신용평가 위지원 금융1실장은 지난달 30일 보고서를 통해 “매년 연말 퇴직연금 시장에서 30%의 자금이 이동하지만, 올해는 금리 인상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할 때 이동 규모가 상당히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금융당국의 경쟁 자제령에 업권별로 금리 격차는 커지지 않게 됐다. 한국신용평가에 따르면 업권별 퇴직연금 원리금 보장형 평균 금리는 은행(5.06%), 생명보험사(5.67%), 저축은행(5.95%), 증권사(6.49%) 등의 순이다. 8%대 고금리를 공시했던 증권사들도 슬며시 발을 빼고 있다. 연 8.25%의 금리를 공시했던 키움증권은 지난 2일 해당 상품 판매를 중단했다. 연 8.5%라는 가장 높은 금리를 공시한 다올투자증권도 “금리는 확정된 사항은 아니다”고 신중한 입장을 내고 있다.

관치 논란도 커지고 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금리는 시장이 결정하는 건데 이를 인위적으로 억누르고 있다”며 “과거에는 예대금리차를 이유로 예금금리를 올리라고 하더니 지금은 반대로 예금금리까지 내리라고 하니 당황스럽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은 불가피한 관치라는 입장이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금리 민감도가 높은 상황에서 과도한 금리 인상 탓에 대규모 머니무브가 일어날 경우 큰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며 “자금유치를 위해 지나치게 높은 금리를 약속하고 시장을 왜곡시키는 행위를 막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 교수는 “한은의 기준금리 인상에 따른 자연스러운 금리 상승을 인위적으로 억누르는 관치 금융이 계속되다 보면, 시장 왜곡에 따른 더 큰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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