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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한 사과’ ‘사흘’ 문해력 논란…청년만의 문제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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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이제는 인문정신 〈상〉 문해력의 위기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한 이동진 영화평론가. ‘기생충’ 한줄평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모습. 사진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한 이동진 영화평론가. ‘기생충’ 한줄평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모습. 사진 tvN

“문해력 위기는 청년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 전체의 문제다. 그에 따른 해법도 종합적일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의 전 생애적인 차원에서 문해력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2019년 ‘명징’과 ‘직조’ 표현을 둘러싼 논란부터 그 이듬해 광복절 ‘사흘 연휴’, 지난해 ‘심심한 사과’까지 최근 몇 년간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군 키워드 중 하나가 문해력(文解力) 논란이다. 한자 표현에 특히 서툰 청년세대의 문장 이해 능력이 자칫 사회 전체의 지적 기반을 허약하게 할 만큼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문해력 위기론이다.

하지만 위기론의 실체, 해법을 찾아 나선 본지 취재진은 서울대 신종호 교육학과 교수로부터 위와 같은 뜻밖의 답을 들어야 했다. “청년세대에 친숙한 영어나 외래어 표현, 디지털 공간에서의 언어 표현에는 기성세대가 오히려 무지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세대별로 언어문화가 다른 데서 비롯된 현상이지 청년세대를 비판할 일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당신의 문해력’의 한 장면. 수업시간에 ‘가제(假題)’의 뜻을 묻자 학생들이 “랍스터(바닷가재) 아니냐”고 답했다. 사진 EBS

‘당신의 문해력’의 한 장면. 수업시간에 ‘가제(假題)’의 뜻을 묻자 학생들이 “랍스터(바닷가재) 아니냐”고 답했다. 사진 EBS

충남대 윤석진 국문과 교수도 비슷한 의견이었다. “청년세대의 문제만 집중 부각돼 ‘과잉 여론화’돼 있다”는 지적이다. “기성세대가 청년세대를 문제 삼는 배경에는 문화적 맥락이 깔려 있는 것 같다. 기초적인 한자 표현도 모르는 청년세대를 못마땅해한다”고 했다. 반면 쉬운 표현을 마다하고 어려운 표현을 써야 뭔가 격조 있다고 생각하는 기성세대는 청년세대에게는 그저 꼰대일 뿐이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한국 사회의 문해력 위기와 관련된 데이터는 흔하다고 할 정도다. 2013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국제성인역량조사(PIAAC)에서 한국은 55~65세 연령층의 언어능력이 전 세계 24개국 가운데 최하위권이었다. 10년 주기의 OECD 조사는 올해는 32개국으로 대상을 늘려 최근 설문·조사를 마쳤다. 2024년 하반기에 결과를 발표한다. 2018년 만 15세 학생을 대상으로 한 OECD의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한국 학생들은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는 능력 문항에서 최하위를 기록했다. 네 명에 한 명꼴(25.6%)로 피싱 메일을 가려내는 데 그쳤다. 네 명 가운데 세 명은 구분해내지 못했다는 얘기다.

이처럼 연령대별로 문해력 위기의 내용이 다르다면 우리는 연령대별로 해법을 달리 설계해야 하는 것일까. 사회 전체의 문해력 위기 배경에 공통 요소는 없는 것일까. 있다면 그에 대한 해법은 뭘까. 인문·교육 분야 학계의 전문가, 지난해부터 방영돼 큰 반향을 부른 EBS ‘당신의 문해력’ 시리즈의 담당 PD, 미국 아이비리그 출신의 토론 멘토, 문학평론가 등의 의견을 폭넓게 들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전문가들은 문해력은 단순히 글을 읽고 쓸 줄 아느냐, 어려운 한자 표현을 많이 아느냐의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그보다는 문장이 놓인 맥락을 알아야 하는 문제라고 했다. 맥락을 안다는 건 무슨 뜻일까.

한양대 조병영 국어교육과 교수는 “문해력에 해당하는 서구의 리터러시(Literacy) 연구에서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문장 안에 들어 있는 정보를 처리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책에 있는 정보와 나의 지식을 통합해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의미 구성’ 과정에서 언어 사용자가 처한 공동체의 사회적 맥락, 개인의 경험과 관점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완전히 중립적인 의미 구성은 존재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심심한 사과’를 둘러싼 논란은 이 표현에 대한 기성세대와 청년세대의 생애 맥락이 달라서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맥락 파악을 어렵게 하는 주범 중 하나는 대충 훑어 읽는 습관이다. EBS ‘당신의 문해력’에서 문해력·어휘력 등 다양한 테스트를 진행한 민정홍 PD는 “성인의 경우 자기가 읽고 싶은 것만 읽다 보니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서강대 조재희 교수(지식융합미디어대학)는 “SNS 등 미디어 이용이 크게 증가하다 보니 문해력 논란이 반복된다”고 진단했다. 과거 책이나 TV·신문이 정보를 독점하던 시절과 비교하면 접근 가능한 정보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다 보니 그만큼 갈등 요소도 커졌다는 얘기다. 정보와 지식이 민주화됐지만, 미디어가 개인화된 결과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확증편향,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정보 취향이 같은 누군가와 한 데 묶이는 그루핑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회적 불통과 대립까지는 멀지 않다.

문해력 위기, 불통 현상의 해법은 뭘까. 고려대 윤인진 사회학과 교수는 “사태를 큰 맥락에서 바라보도록 해(메타 인지) 자신에 대한 이해, 타인에 대한 성찰, 옳음과 그름을 분별하는 지혜, 남을 설득하는 삶의 기술을 가능하게 하는 인문학에 답이 있다고 본다”고 했다. 인문학에 서려 있는 ‘인문정신’의 요체가 지금의 나(actual self)에서 더 큰 나(ideal self)로 넘어가는 징검다리 역할이라는 것이다. 인문학 중에서도 근본은 인간과 세상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역사와 철학이다. 편집문화실험실 장은수 대표는 “천천히 조리 있게 생각해 맥락을 파악하는 능력을 키우는 데 독서만 한 게 없다고 본다. 장기적으로, 독서와 디지털 미디어 사용이 균형을 이루는 습관이 필요하다”고 했다.

중앙일보ㆍ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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