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뉴스는 너무 먼 나라 이야기로 들리곤 합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 낯선 땅의 사람들에게 금세 감정 이입이 되죠. 영화를 통해 더이상 ‘먼 나라’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로 국제 뉴스를 전합니다.
“아일랜드인들은 떠나기 위해 태어나지. 펍이 전 세계에 퍼진 걸 봐.”
아홉살 버디(주드 힐)는 이모의 말이 아리송하기만 합니다. 온 동네가 놀이터고 모든 이웃이 살뜰히 보살펴주는 이곳을 왜 떠난담. 여자친구 캐서린이랑 커서 결혼하려면 지금부터 공을 들여야 하는데 어딜 간단 거죠.
그러나 1969년 북아일랜드 수도 벨파스트의 상황은 소년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천주교도와 개신교도로 나뉘어 치고받고 싸우고 있었거든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버디에게 할아버지는 말합니다. “수학 문제처럼 정답이 있다면 세상이 왜 이 모양이겠니.” 영화 ‘벨파스트’는 30년 가까이 내전에 가까운 폭력 사태를 겪은 북아일랜드 갈등의 시작점을 그린 얘깁니다. 떠나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라니, 이들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영국 옆에 있는 섬나라 아일랜드를 아시죠? 음악영화 ‘원스’의 아름다움이 빛나던 곳이요. 영국-아일랜드 관계는 한국-일본 관계와 비슷한데요. 자세히 보시면 이 섬의 북쪽은 아일랜드 땅이 아닙니다. 영국령인 북아일랜드죠.
이 영화를 꺼내 든 건 바로 이곳, 북아일랜드의 상황이 심상치 않아서입니다. 의회가 10개월째 일을 안 하고 있거든요. 이를테면 의정 ‘보이콧’입니다. 보다 못한 영국 정부가 "자꾸 이러면 급여를 안 주겠다"며 으름장을 놓았지만 들은 척도 안 하고 있어요. 아일랜드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과정, 북아일랜드 내에서 ‘아일랜드랑 합칠 거냐 영국에 속할 거냐’를 두고 싸우던 시간 속에서 피바람이 몰아쳤던 과거를 수습한 지 얼마 안 된 터라 긴장감은 높아져만 갑니다. ‘정치인들이 다 그렇지 뭐’하고 넘기기엔 얽히고설킨 얘기가 꽤 길거든요.
피 맺힌 독립전쟁…. 반쪽짜리 독립 후 더 큰 혼란
아일랜드 독립 투쟁이 한창이던 1920년. 바람에 흔들리는 초록빛 들판에 선 데미엔(킬리언 머피)이 총을 들고선 부들부들 떨고 있습니다. 의사의 꿈을 포기하고 형 테디(패드레익 들러니)를 따라 독립운동에 투신한 데미엔은 변절한 옛 친구를 막 처단한 참입니다. 그러나 친구를 죽이는 일이 쉬울 리가요. 데미엔은 “조국은, 이럴 가치가 있는 거겠지”라는 말을 되뇌며 괴로워합니다. 아일랜드 독립전쟁을 그린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속 장 한 장면이죠.
무려 700년 넘게 영국의 지배를 받은 아일랜드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눈뜬 건 19세기입니다. 특히 1845년부터 7년간 이어진 대기근이 기폭제가 됐죠. ‘감자 잎마름병’으로 감자들이 까맣게 썩어나가며 감자로만 연명하던 농민들이 굶어 죽고 있는데, 영국의 아일랜드 수탈은 멈추지 않았거든요. 100만 명 넘는 사람들이 죽었고, 그만큼의 사람들이 아일랜드를 떠났습니다. 영국에 대한 한은 깊어졌죠. 영화 ‘벨파스트’에서 버디의 이모가 “아일랜드인들은 떠나기 위해 태어난다”고 한 말이 이 비극에 닿아 있습니다.
20세기 들어 독립운동은 더욱 치열해집니다. 영국군에 상대가 되지 않던 아일랜드 독립군은 주로 게릴라전을 펼쳤고 끈질긴 싸움 끝에 영국과 휴전을 하죠. 그렇게 1922년 ‘아일랜드 자유국’이 수립(12월 6일 아일랜드자유국 헌법 선포)됩니다. 문제는 여전히 영국 왕에 충성을 맹세해야 하는 자치령이었단 겁니다. 게다가 영국에서 온 개신교도들이 많았던 북부 6개 주(현재의 북아일랜드)는 영국령으로 남았죠. 아일랜드는 분열됩니다. ‘일단 영국군은 물러갔으니 전쟁을 멈추자’는 이들과 ‘완전한 독립을 향해 투쟁하자’는 이들이 맞붙습니다.
이 싸움이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속에서 휘몰아칩니다. 형 테디는 ‘이 정도면 됐다’고 믿었고, 데미엔은 ‘이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며 분노했거든요. 형제는 한때 함께 갇혀 울었던 감옥에서 죄수와 심문자로 만납니다. 내전이 시작된 거죠. 어쩐지 기시감이 드는 건 우리의 역사도 비슷해서일까요.
폭력 얼룩진 북아일랜드, 겨우 평화 찾았는데 브렉시트로 위기
내전은 1년여 만에 끝났고 아일랜드 자유국은 1949년 완전한 독립국인 현재의 아일랜드가 됐습니다. 그러나 영국령으로 남았던 북아일랜드에선 갈등이 지속했죠. 아일랜드와 합치길 바라는 민족주의자(천주교도)와 친영국파인 연방주의자(개신교도)로 나뉘었거든요. 1969년 투표권과 경제적 기회 등에서 심한 차별을 받던 천주교도의 불만이 폭발합니다. 그저 축구선수가 되기를, 같은 반 친구 캐서린과 결혼하길 꿈꾸던 버디의 유년 시절에 암흑이 드리운 거죠. 1972년 영국군의 발포로 시민들이 숨진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나며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집니다.
수십 년을 싸웁니다. 특히 무장투쟁을 주장한 아일랜드공화군(IRA)은 테러로 악명을 떨쳤죠. 1998년 ‘벨파스트 평화협정(Belfast Agreementㆍ굿 프라이데이 협정)’으로 갈등은 겨우 봉합됩니다. 아일랜드-북아일랜드 국경을 허물고 문화ㆍ경제적으로 자유롭게 교류하도록 한 게 핵심이었죠. 그러고도 IRA가 무장을 해제하기까진 7년이 더 걸렸지만 말입니다.
이후 그럭저럭 잘 지내왔는데 어랏, 영국이 브렉시트(2020년 1월 유럽연합 공식 탈퇴)를 결정합니다. 허물었던 국경이며 무역 장벽을 다시 세워야 하는데, 북아일랜드는 영국(잉글랜드ㆍ스코틀랜드ㆍ웨일스ㆍ북아일랜드로 구성)에 속했으니 당연히 EU에서 나와야 하잖아요? 그러자 불안이 싹틉니다.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사이에 또다시 ‘선’이 생겨서 예전의 갈등이 되살아날까 봐요.
고민 끝에 영국이 해법을 내놓습니다. 영국은 EU에서 빠지지만,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는 자유롭게 오가게 두자는 ‘북아일랜드 협약’(2019)이죠. 북아일랜드는 EU 시장에 남기고, 영국 본섬과 북아일랜드 사이엔 통관ㆍ검역 절차를 만든 겁니다. 이번엔 북아일랜드 내 친영국 연방주의자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아니 우린 영국인데, 왜 영국 본섬하고 국경을 만들어야 해?’ 하는 불만이었죠.
그렇지 않아도 여러모로 골치 아팠던 영국에선 지난 6월 이 협약을 변경하겠다 나섭니다. 그 결과, 지금 북아일랜드 정계에서 '협약을 지키라'는 민족주의자들과 '바꾸자'는 연방주의자들이 대립하게 된 거죠. ‘벨파스트 협정’으로 둘이 연정을 해야만 의회가 굴러갈 수 있는 시스템인데 거의 1년째 일손을 놓은 겁니다. 이 ‘보이콧’은 언제까지 갈까요. 상황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어떤 일을 공동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물리치는 일', '불매동맹' 등을 뜻하는 단어 보이콧(boycott)은 19세기 말 아일랜드 농민 운동에서 시작된 말이다. 당시 아일랜드 메이요주의 대지주 재산 관리인 찰스 보이콧은 소작인들에게 가혹하기로 악명이 높았는데, '아일랜드 토지연맹'이 지역 주민들을 설득해 보이콧 농장의 추수를 거부하고 그에게 물건도 팔지 않은 일이 '보이콧'이란 말의 유래가 됐다.
고향을 떠나게 된 버디가 캐서린과의 헤어짐을 슬퍼하자 아빠는 이렇게 위로합니다.
“쟤는 힌두교일 수도 있고 채식만 하는 적그리스도교일 수도 있어. 하지만 친절하고 올바른 애고, 둘이 서로를 존중한다면 캐서린은 언제든 우리 집에 와도 좋아.”
테디와 데미엔은 결국 비극을 맞이하고 맙니다. 약 50년이 지난 벨파스트에선 버디네 가족이 결국 고향을 등지죠. 그로부터 또 반세기가 흐른 지금, 그럼에도 희망이 보이는 건 아일랜드 사람들은 언제나 자유와 평화를 향해 한 걸음씩 걸어왔다는 사실 때문일 겁니다. 그 걸음은, 저런 따뜻한 위로를 전한 버디의 아빠 같은 사람들이 만들었겠죠. 이젠 그 가르침을 받은 ‘버디’들이 나설 차례입니다. 재미있게도, 미하일 마틴 아일랜드 총리는 1960년생으로 버디와 동갑이라네요.
'토르: 천둥의 신' '신데렐라' '오리엔트 특급 살인' 등을 만든 아일랜드 출신 케네스 브래너 감독이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2021년 내놓은 흑백영화다. 제94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받았다.
세계적인 거장 켄 로치가 2006년 발표한 작품이다. 영국 감독이 아일랜드 독립전쟁 이야기를 다뤄 주목을 받았으며, 제59회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아일랜드 출신 스타 배우 킬리언 머피가 주연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