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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프리즘]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는 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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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6호 30면

박신홍 정치에디터

박신홍 정치에디터

2020년 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는 아시타비(我是他非)였다. 나는 옳고 남은 틀렸다는 내로남불이 만연한 세태를 꼬집기 위해 원전에 없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 2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는 그때보다 조금이나마 나아졌을까. 오히려 분위기는 더 흉흉해졌다는 게 대다수 민심일 게다. 아시타비가 그나마 상대방과 비교하는 수준이었다면 이젠 오직 나만 옳고 나만 선이라는 유아독존식의 ‘아집’이 정치·경제·사회 전 분야에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옳다는 착각을 넘어 나만 옳다는 교만이 온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아유시교(我唯是驕)라는 또 다른 사자성어를 만들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상황이다.

나만 옳다는 교만이 팽배한 사회지만
눈 감고 모른 체하는 게 능사는 아냐

우리 주위를 한번 둘러보자. 남들이 뭐라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주변 사람들 모두 고개를 가로젓지만 정작 본인만 모른 채 나만 잘되면 그뿐이라는 자기중심적 사고에 빠져 사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문제는 이런 자들이 크든 작든 권력을 갖게 되면 그 폐해가 훨씬 더 커지기 십상이란 점이다. 혼자만의 망상은 자유지만 주어진 권한을 휘둘러 주변에 정신적·물질적 피해를 주게 될 경우 이는 곧 사회 문제로 비화될 수밖에 없다. 사적 관계도 이럴진대 국가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정치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코로나 팬데믹에 켜켜이 쌓인 국민의 고통은 나 몰라라 하고 오로지 권력 다툼에만 매몰돼 있는 게 한국의 정치 현실 아닌가.

하루에 36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회, 공식 집계된 우울증 환자만 100만 명에 지난 2년간 20대 우울증 환자가 45%나 급증한 사회, 새벽 인력시장에 나가 길게 줄을 서도 일감을 얻기조차 힘든 사회. 경제적 압박과 사회적 소외로 고통받는 이들이야말로 우리의 이웃들 아닌가. 이런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고 어떤 정치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의 존재 이유가 뭔가. 왜 ‘정치인’이 되려 했는가. 입신양명이 목표였는가, 권력의 향기에 취해서인가. 내가 받은 만큼 사회에 돌려주겠다는 초심은 대체 어디에 버려둔 것인가.

그렇다고 마냥 정치 탓하며 체념만 할 순 없다. 이 땅은 우리가 매일 발을 딛고 살아가야 하는 삶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최근 개봉한 영화 ‘올빼미’에서 주맹증 침술사인 천경수가 “저희같이 미천한 것들은 보고도 못 본 척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며 ‘현실론’을 펴자 소현세자는 “안 보고 사는 게 좋다 하여 눈을 감고 살면 되겠는가. 그럴수록 눈을 더 크게 뜨고 살아야지”라고 했다. 눈이 보이는 자들이 세상을 제멋대로 왜곡하는 걸 눈 감고 모른 체하는 게 능사가 아니며, 오히려 눈을 계속 뜨고 있어야 저 멀리 동굴 끝에 보이는 조그만 희망의 불빛이라도 부여잡을 수 있음을 소현세자는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통해 익히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넬슨 만델라는 ‘감옥에서 그 오랜 절망의 세월을 어떻게 견뎌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나는 한순간도 아즈위(Azwie·희망)를 포기한 적이 없다. 사람이 죽음을 택하는 건 힘들어서가 아니라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내일도 아즈위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 또한 모두의 눈을 돌리게 하는 게 현실이지만,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는 건 위기 때마다 대한민국이란 공동체를 꿋꿋이 지탱해 온 우리 국민의 저력을 믿기 때문이다. 아무리 약육강식과 교언영색이 판친다 해도 결국 역사는 합목적적으로 나아갈 것이란 믿음 때문이다.

이제 12월이다. 한 해를 정리하며 잠시나마 우리 자신을 되돌아볼 때다. 나만 옳다는 아집에 나도 모르게 빠져 있진 않은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진 않은지. 이런 자기 성찰이 하나둘 쌓일 때 우리 사회도 한층 건강해지고 아유시교의 끝판왕인 정치인들에게도 당당히 경고장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아즈위 포에버. 새해엔 부디 판도라의 상자 속 희망이 우리와 함께하기를. 그래서 ‘정상적인’ 정치를 꼭 한번 볼 수 있게 되기를.

박신홍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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