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는 아시타비(我是他非)였다. 나는 옳고 남은 틀렸다는 내로남불이 만연한 세태를 꼬집기 위해 원전에 없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 2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는 그때보다 조금이나마 나아졌을까. 오히려 분위기는 더 흉흉해졌다는 게 대다수 민심일 게다. 아시타비가 그나마 상대방과 비교하는 수준이었다면 이젠 오직 나만 옳고 나만 선이라는 유아독존식의 ‘아집’이 정치·경제·사회 전 분야에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옳다는 착각을 넘어 나만 옳다는 교만이 온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아유시교(我唯是驕)라는 또 다른 사자성어를 만들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상황이다.
나만 옳다는 교만이 팽배한 사회지만
눈 감고 모른 체하는 게 능사는 아냐
우리 주위를 한번 둘러보자. 남들이 뭐라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주변 사람들 모두 고개를 가로젓지만 정작 본인만 모른 채 나만 잘되면 그뿐이라는 자기중심적 사고에 빠져 사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문제는 이런 자들이 크든 작든 권력을 갖게 되면 그 폐해가 훨씬 더 커지기 십상이란 점이다. 혼자만의 망상은 자유지만 주어진 권한을 휘둘러 주변에 정신적·물질적 피해를 주게 될 경우 이는 곧 사회 문제로 비화될 수밖에 없다. 사적 관계도 이럴진대 국가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정치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코로나 팬데믹에 켜켜이 쌓인 국민의 고통은 나 몰라라 하고 오로지 권력 다툼에만 매몰돼 있는 게 한국의 정치 현실 아닌가.
하루에 36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회, 공식 집계된 우울증 환자만 100만 명에 지난 2년간 20대 우울증 환자가 45%나 급증한 사회, 새벽 인력시장에 나가 길게 줄을 서도 일감을 얻기조차 힘든 사회. 경제적 압박과 사회적 소외로 고통받는 이들이야말로 우리의 이웃들 아닌가. 이런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고 어떤 정치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의 존재 이유가 뭔가. 왜 ‘정치인’이 되려 했는가. 입신양명이 목표였는가, 권력의 향기에 취해서인가. 내가 받은 만큼 사회에 돌려주겠다는 초심은 대체 어디에 버려둔 것인가.
그렇다고 마냥 정치 탓하며 체념만 할 순 없다. 이 땅은 우리가 매일 발을 딛고 살아가야 하는 삶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최근 개봉한 영화 ‘올빼미’에서 주맹증 침술사인 천경수가 “저희같이 미천한 것들은 보고도 못 본 척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며 ‘현실론’을 펴자 소현세자는 “안 보고 사는 게 좋다 하여 눈을 감고 살면 되겠는가. 그럴수록 눈을 더 크게 뜨고 살아야지”라고 했다. 눈이 보이는 자들이 세상을 제멋대로 왜곡하는 걸 눈 감고 모른 체하는 게 능사가 아니며, 오히려 눈을 계속 뜨고 있어야 저 멀리 동굴 끝에 보이는 조그만 희망의 불빛이라도 부여잡을 수 있음을 소현세자는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통해 익히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넬슨 만델라는 ‘감옥에서 그 오랜 절망의 세월을 어떻게 견뎌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나는 한순간도 아즈위(Azwie·희망)를 포기한 적이 없다. 사람이 죽음을 택하는 건 힘들어서가 아니라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내일도 아즈위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 또한 모두의 눈을 돌리게 하는 게 현실이지만,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는 건 위기 때마다 대한민국이란 공동체를 꿋꿋이 지탱해 온 우리 국민의 저력을 믿기 때문이다. 아무리 약육강식과 교언영색이 판친다 해도 결국 역사는 합목적적으로 나아갈 것이란 믿음 때문이다.
이제 12월이다. 한 해를 정리하며 잠시나마 우리 자신을 되돌아볼 때다. 나만 옳다는 아집에 나도 모르게 빠져 있진 않은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진 않은지. 이런 자기 성찰이 하나둘 쌓일 때 우리 사회도 한층 건강해지고 아유시교의 끝판왕인 정치인들에게도 당당히 경고장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아즈위 포에버. 새해엔 부디 판도라의 상자 속 희망이 우리와 함께하기를. 그래서 ‘정상적인’ 정치를 꼭 한번 볼 수 있게 되기를.
박신홍 정치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