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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신냉전 승리 위해 과학기술 ‘프런티어 정신’ 되살린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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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6호 22면

디지털 걸리버여행기

지난 6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주 포킵시 IBM 연구센터에서 연설 중인 조 바이든 대통령. IBM은 이날 뉴욕 허드슨밸리 지역에 10년간 20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AFP=연합뉴스]

지난 6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주 포킵시 IBM 연구센터에서 연설 중인 조 바이든 대통령. IBM은 이날 뉴욕 허드슨밸리 지역에 10년간 20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AFP=연합뉴스]

미국 MIT를 지난 10년간 혁신적으로 바꾼 라파엘 라이프 총장은 타이완의 TSMC 이사도 겸직하고 있는 저명한 반도체 전문가다. 그는 코로나 백신을 개발한 모더나와 이 회사를 키운 벤처 캐피털 ‘플래그십 파이오니어링’이 위치한 MIT 켄들 스퀘어를 재개발해 이곳을 세계 바이오 산업 혁신의 메카로 만들었다.

라이프 총장은 중국의 공격적이고 폐쇄적인 산업기술 정책에 대해 선제적으로 대응한 인물이다. 그는 자본 효율성을 우선하는 미국 벤처 캐피털로는 중국의 국가 주도 전략에 대응하기 어렵다고 보고 2016년 대학으로는 처음으로 자체 벤처 캐피털 ‘MIT 엔진(The Engine)’을 설립했다. 세계의 가장 어려운 ‘터프 테크’ 문제에 도전하는 스타트업에 투자하기 위한 중장기 혁신 자본이다. 제1호 펀드에 2억 달러를 모았고, 2020년 결성한 2억3000만 달러 규모의 제2호 펀드에는 하버드 발전기금도 출자했다.

‘아메리카 프런티어 펀드’도 설립

MIT 엔진이 투자한 대표적인 터프 테크가 핵융합 발전이다. MIT 연구진이 2030년경까지 핵융합 발전을 상용화하기 위해 2018년 설립한 ‘커먼웰스 퓨전 시스템즈(Commonwealth Fusion Systems)’에 마중물 투자를 하여 이 회사가 2021년 빌 게이츠, 조지 소로스, 존 도어 등으로부터 18억 달러의 투자를 유치하도록 도왔다. 존 도어는 올해 9월 설립된 스탠퍼드 지속가능 대학에 11억 달러를 기부한 벤처 캐피털리스트이다.

한편 평소 중국의 공격적 산업정책에 대한 미국의 경각심을 일깨워온 구글의 전 최고경영자(CEO) 에릭 슈미트와 페이팔 창업자 피터 틸은 올해 6월 최초의 비영리 벤처 캐피털 ‘아메리카 프런티어 펀드(AFF)’ 설립을 후원했다. 두 사람은 각각 민주당과 공화당을 지지하는 억만장자이다.

CIA 벤처캐피털 인큐텔(In-Q-Tel)의 초대 CEO 경력의 길만 루이가 AFF CEO를 맡고 슈미트 재단 임원 조던 블라셐이 최고운영책임자(COO), 전 IBM CEO 새뮤얼 팔미사노가 이사회 의장을 맡았다. 맥 마스터 전 국가 안보 보좌관 등이 이사로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힘을 추종하는 중국과 이윤을 추종하는 미국의 간격을 메우기 위해 AFF를 설립했다고 말한다. 지난달 22일 뉴멕시코 주가 처음으로 1억 달러 출자를 결정했다.

전쟁은 새로운 과학기술을 낳고 새로운 과학기술은 인류에게 새로운 문명을 가져온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유럽의 첨단 과학을 단기간에 흡수해 세계 정상의 과학기술국가가 된 미국은 전후에도 이 경쟁력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한 체계를 고민했다.

버니바 부시 전 MIT 교수. [사진 미국의회도서관]

버니바 부시 전 MIT 교수. [사진 미국의회도서관]

루스벨트 대통령을 설득해 전시 연구개발 총괄국(OSRD)을 세웠던 MIT 전기공학과 교수 버니바 부시는 미국 대학에 흩어져 있는 우수한 인재들을 동원해 원자탄 등 전략 과학기술 개발을 지휘했다. 전쟁도 끝나기 전인 1944년 말부터 그는 과학기술이 주도하는 미국의 새로운 미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미국의 대표적인 과학자 버니바 부시가 낸 ‘과학: 그 무한한 프런티어’ 보고서. [사진 미국 정부인쇄국]

미국의 대표적인 과학자 버니바 부시가 낸 ‘과학: 그 무한한 프런티어’ 보고서. [사진 미국 정부인쇄국]

미국이 일본에 원자탄을 투하하기 바로 직전 부시는 미국 역사의 변곡점을 만든 ‘과학: 그 무한한 프런티어(Science, the Endless Frontier)’ 보고서를 발표했다. 전시 연구개발 예산을 평화 시대 연구비로 전환하고 부족한 고급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대학의 교육 연구 체계를 정비하도록 권고했다.

라파엘 라이프 MIT 총장. [사진 CFS]

라파엘 라이프 MIT 총장. [사진 CFS]

이 보고서에 따라 생겨난 미국 국립과학재단(NSF)은 MIT, 하버드, 프린스턴, 스탠퍼드, UC버클리와 같은 미국의 초일류 대학이 성장하는 기반이 됐다. 미국을 세계 제일의 경제 대국으로 만들고 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미국이 세계 제일의 국방력과 외교적 영향력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실리콘밸리도 부시의 제자인 프레드릭 터만 스탠퍼드대 교수가 전쟁 중 하버드 전파 연구소에서 레이더 개발을 지휘했던 경험을 살려 국가 연구비를 끌어와 대학 연구를 활성화하고 창업 인프라를 만들면서 시작됐다.

한국 대학 미 진출, 주도적 역할을

커먼웰스 퓨전 시스템즈(Commonwealth Fusion Systems)가 MIT와 함께 만들 핵융합 발전 장치 SPARC. [사진 MIT]

커먼웰스 퓨전 시스템즈(Commonwealth Fusion Systems)가 MIT와 함께 만들 핵융합 발전 장치 SPARC. [사진 MIT]

역사는 반복된다. 미국은 최근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과학기술 영웅 부시의 ‘그 무한한 프런티어’ 정신을 되살리고 있다.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75%까지 쫓아온 중국의 시진핑 총서기가 인구 14억 5000만명의 중국을 세계 제1의 강대국으로 만들고자 하는 야망을 숨기지 않기 때문이다. 아메리카 프런티어 펀드의 ‘프런티어’도 부시의 보고서에서 따온 것이다.

미국에 버금가는 경제 규모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중국의 도전에 허를 찔린 미국은 신냉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새로운 판을 짜기 시작했다. 지난 여름 제정된 미국의 ‘반도체와 과학법(CHIPS+법)’이 새로운 판의 전략을 보여줬다. 이어 9월에 NVIDIA 최고과학자 빌 달리와 AMD CEO 리사 수가 이끄는 11명의 미국 최고 전문가들이 이 판의 구체적 내용을 담은 ‘미국 반도체 생태계 되살리기’ 전략 보고서를 바이든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미국 국가 안보에 결정적인 자국 내 반도체 제조 비율은 1990년의 37%에서 12%로 줄었다. CHIPS+법은 한국과 타이완에 집중된 반도체 생산시설을 미국에 옮겨오기 위한 막대한 보조금을 예산으로 반영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더 무서운 것은 연구개발과 인재양성 예산 규모다. 5년 동안 각각 110억 달러, 10억 달러를 투입해 매년 2500명의 대학원생에게 연구 장학금을 지원하고 1만명의 인재를 배출할 계획이다. 50개 대학에 100명의 교수 채용과 교육 시설 업그레이드를 지원한다.

이 정도 규모이면 미국이 자국 영토에서 반도체의 상당 부분을 생산하고 반도체 산업과 인공지능, 생명과학 등 연관 분야에서 많은 혁신 스타트업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반도체가 제1 주력 산업인 한국 전략은 무엇인가? 우리 기업들이 미국에 이미 상당한 반도체 생산시설을 약속한 마당에 연구와 인재 양성의 책임을 지는 한국의 대학도 미국에 진출해 미국이 새로 구축하는 생태계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위기를 선제적으로 기회로 바꿀 전략적 사고와 리더십이 필요한 때다.

차상균 서울대 데이터사이언스대학원 초대 원장. 서울대 전기공학사, 계측제어공학석사, 스탠퍼드대 박사. 2014~19년 서울대 빅데이터연구원 초대 원장. 2002년 실리콘밸리에 실험실벤처를 창업했다. 이 회사를 인수한 독일 기업 SAP의 한국연구소를 설립해 SAP HANA가 나오기까지의 연구를 이끌고 전사적 개발을 공동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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