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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무지개 완장’ 소동, FIFA 이중성에 화합 정신 퇴색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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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6호 24면

김진경의 ‘호이, 채메’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국제축구연맹(FIFA) 박물관. 카타르 월드컵을 기념해 현재 ‘무지개(The rainbow)’라는 전시가 진행 중이다. 축구 유니폼을 무지개색으로 배열하고, 회원국 이름을 다양한 색깔로 나타냈다. ‘211개의 문화, 하나의 경기(211 cultures, one game)’라는 문구가 곳곳에 보인다. 정작 FIFA가 주관하는 월드컵 현장에서는 무지개색이 금지됐다. [사진 김진경]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국제축구연맹(FIFA) 박물관. 카타르 월드컵을 기념해 현재 ‘무지개(The rainbow)’라는 전시가 진행 중이다. 축구 유니폼을 무지개색으로 배열하고, 회원국 이름을 다양한 색깔로 나타냈다. ‘211개의 문화, 하나의 경기(211 cultures, one game)’라는 문구가 곳곳에 보인다. 정작 FIFA가 주관하는 월드컵 현장에서는 무지개색이 금지됐다. [사진 김진경]

며칠 전 길에서 딸아이의 친구들을 만났다. 열 살배기 여자아이들 몇몇이 나를 붙잡고 물었다. “아줌마 성이 김이죠? 근데 한국 축구 선수 중에 김씨가 왜 이렇게 많아요? 거의 다 김인데 누가 누군지 어떻게 알아보냐고요!” 한국에서 가장 흔한 성이 김이라고 알려주면서도, 아이들이 축구 보며 선수들을 구분하느라 고생이겠다 싶었다.

그다음 날에는 초등학교 1학년인 아들이 학교에 다녀오더니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엄마, 애들이 한국 축구 선수들은 왜 수염이 하나도 없냐고 나한테 물어. 한국 사람들은 수염이 안 나?” 한국 선수들의 수염 깎은 매끈한 얼굴이 아이들에겐 낯설었다 보다. 이곳엔 매일 면도하는 남자들보다 수염 기른 남자들이 더 많으니 그럴 법도 하다.

월드컵은 먼 나라 문화를 간접적으로나마 접하기에 아주 좋은 기회다. 월드컵이 아니었더라면 스위스 사는 아이들이 한국인의 성이나 한국 남자들의 수염 없는 얼굴에 관심 가질 일이 뭐 있겠나. 월드컵의 영향력은 수염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전 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축구라는 보편적이고 인기 많은 스포츠로 각국이 겨루는 이 무대는, 특정한 생각이나 주장을 전파하는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일부 유럽 대표팀 주장들이 이번 월드컵에서 성소수자들과 연대하는 의미로 무지개색 ‘원러브(one love)’ 완장을 차고 뛰기로 결정한 게 그 때문이다. 더구나 개최국이 카타르다.

“한국 사람들은 수염이 안 나나요?”

‘원 러브’ 완장을 찬 낸시 페이저 독일 내무장관(오른쪽)이 베른트 노이엔도르프 독일 축구연맹(DFB) 회장과 대화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원 러브’ 완장을 찬 낸시 페이저 독일 내무장관(오른쪽)이 베른트 노이엔도르프 독일 축구연맹(DFB) 회장과 대화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성소수자를 포용하지 않는 국가에서 세계인의 축제인 월드컵이 열리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반발이 처음부터 많았는데, 온갖 잡음 속에서 어쨌거나 대회가 시작되었으니 원러브 완장으로 소극적 의견 표명이라도 하려는 거였다. 그런데 국제축구연맹(FIFA)이 완장 착용 시 옐로카드를 부과한다는 방침을 내놓으면서 이것이 무산됐다. 원러브 완장 착용을 계획했던 유럽 7개국 대표팀(스위스·독일·벨기에·네덜란드·잉글랜드·웨일스·덴마크)은 11월 21일 공동 성명을 내고 완장 착용을 포기한다고 밝혔다. 벌금이라면 몰라도 선수가 경기장에서 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부담은 감당하기 버거웠을 것이다.

선수들의 완장 착용 무산으로 성소수자 포용의 메시지 전달은 힘을 잃게 됐다. 이를 두고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는 완장에 관한 찬반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소수자 이슈는 월드컵축구가 아니라도 여전히 각국에서 논란이 그치지 않는 주제다. FIFA나 카타르 정부 등 직접적인 이해가 걸린 당사자들을 제외한 완장반대론자들의 목소리는 아무래도 완장찬성론자들에 비해 그다지 높지는 않은 편이다.

‘완장론자’들은 먼저 근본적으로는 성소수자 인권을 탄압하는 카타르 정부에 그 책임을 묻는다. 원러브라는 메시지는 카타르라서 유의미했고, 카타르라서 제약받았다. 기후가 적합하지 않은 곳에서 굳이 천문학적 비용을 들여 월드컵을 여는 상황이나 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이주 노동자 수천 명이 사망한 점 등 이번 월드컵은 이것 말고도 문제가 많다고 본다.

FIFA의 협박에 완장을 내려놓은 선수들에게도 비판적이다. ‘성소수자 인권보다 옐로카드 안 받는 게 더 중요하냐’는 비판이 이미 넘친다. 축구 선수들이 돈과 인기를 거머쥔 특권층인 만큼 그 지위를 공공의 가치를 위해 써야 한다는 주장이나, 선수들 또한 저마다 정치적 의견이 다른 개인이니 획일적 시위 동참을 강요할 수 없다는 주장 모두 일리가 있다. 스포츠와 정치는 별 관련이 없는 듯하면서도 종종 서로의 경계를 넘나든다. 평소 개인의 정치적 견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스위스 축구선수들도 경기장에서 정치적 시위를 벌여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적이 있다.

‘원 러브’ 완장을 찬 낸시 페이저 독일 내무장관(오른쪽)이 베른트 노이엔도르프 독일 축구연맹(DFB) 회장과 대화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원 러브’ 완장을 찬 낸시 페이저 독일 내무장관(오른쪽)이 베른트 노이엔도르프 독일 축구연맹(DFB) 회장과 대화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1995년 9월 6일 스웨덴 예테보리에서 열린 유럽축구선수권대회 예선에서 있었던 일이다. 스웨덴-스위스 경기였다. 경기장에 스위스 국가가 울려 퍼지자, 스위스 선수들이 갑자기 돌돌 말려 있던 흰 천을 펼쳐 들었다. 천에는 “시라크 멈춰라(Stop Chirac)”라고 쓰여 있었다. 바로 전날 프랑스가 남태평양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 있는 무루로라 환초에서 핵실험을 했고, 그 소식을 아침에 신문에서 본 스위스 선수들이 즉흥적으로 계획한 시위였다. 주도자는 당시 27세 미드필더였던 알랭 주터. 동료 선수들의 동의를 얻은 주터는 자신의 호텔 방에 있던 하얀 침대 시트에 까만 스프레이로 저 문구를 썼다.

몇 년 전 주터는 한 축구잡지(11 Freunde)와의 인터뷰에서 그때 일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평소 전혀 정치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1995년 9월 6일 그날 우리(스위스 축구선수들)에게 핵폭탄 외에 다른 화제는 없었다.” 현장에 있었던 로이 호지슨 대표팀 감독이나 마르셀 마티어 스위스축구협회 회장은 이 계획에 대해 미리 알지 못했다. 마티어 회장은 다음날 스위스로 돌아온 뒤, 이후 오랫동안 되풀이 인용되는 발언을 남긴다. “정치를 위해 스포츠를 남용해선 안 된다!” 이 사건의 파장은 컸다.

위선이라도 포용·연대 목소리 필요

스웨덴 언론은 ‘스위스가 킥오프 전에 이미 경기에서 승리했다’며 선수들을 지지했고, 관련 규정이 없어 선수들은 처벌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1년 뒤 유럽축구협회(UEFA)는 ‘스포츠와 관계없는 의견 표명’은 처벌 대상이라는 규정을 새로 만든다.

완장론자들은 가장 결정적인 책임은 FIFA에 있다고 본다. 많은 논란 속에 카타르를 개최국으로 지명한 것도, 옐로카드라는 무기로 선수들을 압박한 것도 FIFA이기 때문이다. FIFA 본부는 스위스 취리히에 있고 현 FIFA 회장은 스위스·이탈리아 이중국적자인 지안니 인판티노다. 2016년 이후 쭉 FIFA 수장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는 내년 회장 선거에도 단독 출마했다. 카타르 월드컵 논란에 대해 그동안 거의 의견을 내지 않았던 그가 11월 19일 도하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한 시간 이상 말을 쏟아 냈다.

“나는 차별받는 게 뭔지 안다. 어렸을 때 빨간 머리에 주근깨가 있어 따돌림을 당했다. 게다가 나는 이탈리아인이었다. 생각해 보라.”(그의 부모는 이탈리아 출신 이민자였고 그는 스위스에서 태어나 자랐다. 스위스에서 이탈리아인들은 종종 차별 대상이었다) “이민자를 잘 대우하지 않았던 유럽인들은 지난 3000년간 해 온 일에 대해 앞으로 3000년 동안 사과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도덕적 교훈을 전파하기 전에 말이다.” “당신들은 나를 십자가에 매달아도 된다. 하지만 카타르를 비난하지 말라.”

자신의 어린 시절과 유럽의 식민 지배 과거를 들어 카타르를 옹호하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어릴 때 차별받은 자가 현재 벌어지는 차별을 감싸고 들면 수긍해야 하는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인판티노는 카타르의 인권 침해를 우려하는 유럽이 ‘위선적’이라고 했다. 카타르 걱정 이전에 자국 내 차별이나 신경 쓰라고도 했다. 죄 없는 자 돌을 던지라는 거다. 근거 없는 말은 아니다. 원러브 완장을 차려 했던 7개국 중 하나인 스위스에서 동성 결혼법이 통과된 건 겨우 지난해 9월 국민투표에서였다. 전 세계에서 서른 번째, 서유럽 국가 중에선 사실상 마지막으로 동성 결혼을 합법화했다. ‘너나 잘하세요’라는 말이 나올 법도 하다.

하지만 스위스의 동성애자들은 비록 최근까지 법적 혼인 관계는 못 맺었다 해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살지는 않는다. 스위스에서도 외국인 노동자들이 3D 직종에 종사하며 차별받지만 위험한 노동 환경 때문에 죽어나가지는 않는다. 그것이 위선이라 하더라도, 아주 작은 변화라도 끌어내려면 포용과 연대의 목소리는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취리히 시의회는 월드컵을 보이콧하는 의미로 지난 11월 16일 투표를 통해 공공장소 경기 상영을 금지했다. 반면 취리히에 있는 FIFA 박물관은 대형 스크린으로 모든 경기를 상영한다. 이 박물관에서는 현재 ‘무지개(The rainbow)’라는 주제의 전시가 진행 중이다. ‘211개의 문화, 하나의 경기(211 cultures, one game)’라는 전시 문구가 붙어 있다.

카타르에서 무지개색을 금지하고 취리히에서 무지개 전시를 여는 FIFA가 주관하는 월드컵이 세계를 하나로 통합할 수 있을까. 분열은 이미 진행 중이다.

김진경 스위스 거주 작가. 한국에서 일간지 기자로 일했다. 스페인 남자와 결혼해 스위스 취리히로 이주한 뒤 한국과 스위스의 매체에 글을 기고해 왔다. 저서로 『오래된 유럽』이 있다. 현재 취리히대학에서 인터넷 플랫폼과 그것을 둘러싼 사회의 변화에 대해 공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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