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 별세…‘최틀러’ 별명 가진 정통 보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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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가 2003년 12월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그는 2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84세. 중앙포토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가 2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4세.

경남 산청의 벽지에서 태어난 고인은 40대 초에 홀몸이 된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명석한 두뇌를 가진 그는 부산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한국일보에 입사했다. 조선일보로 옮긴 뒤 정치부장과 편집국장을 지냈고, 5공 때인 1985년 민정당에 입당해 12대 전국구(비례대표)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정치인 최병렬’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한 건 민주화 이후 1988년 2월 노태우 정부가 출범한 때부터다. 청와대 정무수석을 맡은 고인은 ‘5공 비리’ 청문회가 열리는 등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비판 여론이 들끓자 “합천 생가로 가시라”고 권했다. 이 말에 전 전 대통령이 “백담사로 가겠다”고 답하면서 백담사 은둔이 시작됐다.

기자 시절, 후배들은 추진력이 강한 그를 ‘최틀러’(최병렬+히틀러)라 불렀다. 이는 노동부 장관을 지낼 때도 그를 상징하는 별명이었다. 노동계와 마찰을 빚으면서도 ‘무노동 무임금’이란 대원칙을 세웠고, 울산 현대자동차 공장에서 파업 사태가 벌어졌을 때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자 사표까지 던지며 공권력 투입을 성사시켰다. 노태우 정부에서 문화공보부·공보처·노동부 등 3개 부처 장관을 지낸 그는 1992년 총선 때 민주자유당(민자당)의 전국구로 두 번째 금배지를 달았다.

1992년 대선 때는 민자당 선거대책위 기획위원장으로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당선을 도왔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발생하자 YS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고인을 서울시장(임명직)으로 투입했다. 1995년 지방자치 시대가 열리면서 조순 전 서울시장이 선거로 뽑히기까지 7개월여 시장으로 재임했지만, 훗날 한 언론사가 발표한 ‘역대 공무원 베스트 10’에 뽑힐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4선(12·14·15·16대) 의원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던 고인은 2003년 6월, 한국 정당 사상 처음으로 23만 대의원의 직접 투표를 통해 한나라당 대표에 당선됐다. 노무현 정부를 상대로 강경 노선을 이어간 고인은 2003년 11월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측근 비리 의혹 관련 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하자 단식 투쟁에 나섰다. 10일간의 단식 끝에 결국 국회가 특검법을 재의결하는 성과를 거뒀다.

승승장구하던 고인에게 정치적 시련은 갑자기 닥쳐왔다. 대표 취임 1년도 안 된 시점에 이른바 ‘차떼기 사건’으로 불린 불법 대선 자금 사건이 한나라당을 덮치면서 소장파와 중진들로부터 사퇴 압력을 받았다. 그러던 중 17대 총선 직전인 2004년 3월 12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되면서 거대한 역풍이 불었고, 불과 11일 뒤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표직 사퇴와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2011년 펴낸 자서전 『보수의 길, 소신의 삶』에서 고인은 “솔직히 실제 탄핵안이 국회에서 통과될 것이란 확신이 없었는데 예상치 않게 그날로 가결됐다”며 “방송이 국민감정을 자극해 그토록 거센 역풍이 불도록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술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