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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한 이웃처럼 나도 죽겠죠" 첫 한파경보날, 용산 텐트촌엔 [르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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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감 기온이 영하 20도를 기록한 30일 파란색 플라스틱 이사 상자로 만든 현관문을 열고 나온 김모(58)씨는 문간에 놓은 부탄가스 버너를 틀어 잠시 손을 녹였다. 김씨가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보였다. 김씨의 집은 국제업무지구 개발사업이 추진 중인 서울 용산구 정비창 부지 한켠에 있는 텐트다. 김씨는 5년째 이곳에 살고 있다.

서울 용산역 아이파크몰의 ‘달주차장’으로 연결된 고가도로 아래 버려진 공원에는 텐트 20여개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고가와 연결된 좁은 계단이 이곳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15년 전만 해도 빈 땅이었던 이곳에 종이 박스에 몸을 누이려는 노숙인들이 하나 둘 찾아들더니 어느덧 텐트촌으로 발전했다. 지금은 25명 가량이 이곳 주민이다. 대부분 낮에는 일을 하러 나가거나 용산역 대합실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해가 지면 잠을 청하러 돌아온다.

 김모(58)씨가 지내고 있는 텐트 내부. 박씨가 서울 용산역과 전자상가 사이에 있는 '용산 텐트촌'에 온 건 지난 2015년이다. 버려진 텐트 폴대에 비닐을 씌운 천막을 공간을 만들었다. 이곳에서 박씨는 가스불도 쬐고 식사도 해결한다. 최서인 기자.

김모(58)씨가 지내고 있는 텐트 내부. 박씨가 서울 용산역과 전자상가 사이에 있는 '용산 텐트촌'에 온 건 지난 2015년이다. 버려진 텐트 폴대에 비닐을 씌운 천막을 공간을 만들었다. 이곳에서 박씨는 가스불도 쬐고 식사도 해결한다. 최서인 기자.

 물도 전기도 없는 이곳에선 핫팩이 유일한 난방기구다. 체감 기온이 영하 20도까지 떨어져 첫 한파 경보가 내린 지난 29일 밤도 대부분의 주민들은 핫팩 한두 장으로 버텼다. 김씨는 “처음 텐트촌에 왔을 때는 4~5개월동안 추위가 도저히 적응이 안됐는데, 이제 면역이 돼서 괜찮다”며 “핫팩도 무한정 있는 게 아니니 웬만하면 한 장으로 버틴다. 영하 5도 아래로 내려가면 두 개를 쓰기도 한다”고 말했다. 텐트촌 살이 12년차라는 이모(62)씨는 “핫팩을 흔들어 침낭 안에 집어넣고, 잠시 가스버너를 켜서 몸을 좀 녹인 뒤에 들어간다. 그 위에 패딩을 덮고 자면 견딜 만하다”고 말했다. 이씨는 ‘월동 준비’ 차원에서 시민단체에서 나눠준 군용 핫팩 십수개를 비닐봉투에 모아 뒀다.

가스버너도 없어서는 안될 생존 도구다. 취사에도 쓰지만 싸늘한 기운을 잠시라도 걷어내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씨는 “계속 켜 놓으면 위험하고 켰다 껐다 한다. 잘 관리하면 위험하지 않다”고 말했다. 한 10분쯤 버너를 켰다 껐다 하다보니 가스 1통만으론 하루를 버틸 수 없다. 날이 너무 추우면 부탄가스도 먹통이 돼서 여러 통을 번갈아 쓰며 녹여줘야 한다. 이씨는 “마트에서 4개 묶음에 4000원 하던 부탄가스가 어느새 5000원이 되는 등 물가가 부쩍 오른 게 걱정”이라고 말했다.

서울 용산역 텐트촌에 거주하는 김모(58)씨가 가스 버너를 켜서 손을 녹이고 있다. 10분마다 버너를 껐다 켰다 하며 난방을 한다. 최서인 기자.

서울 용산역 텐트촌에 거주하는 김모(58)씨가 가스 버너를 켜서 손을 녹이고 있다. 10분마다 버너를 껐다 켰다 하며 난방을 한다. 최서인 기자.

대비를 단단히 해도 동사자는 나온다. 이곳에서 15년간 살아온 이재신(52) 씨는 “5년 전 겨울이 너무 추웠다. 그때 기온이 영하 20도까지 떨어졌는데 하룻밤만에 2명이 동사했다”고 했다. 제대로 침낭을 여미지 않고 잠들면 생기는 사고다. “지난 12년 동안 빈속에 술 먹고 누워서 자다가 그대로 돌아가신 분을 3~4명 봤다”는 주민도 있었다.

바람 피하려 세운 천막, 홀랑 타버려

 텐트촌에도 변화는 있었다. 주민들은 겨울 바람을 막기 위해 이씨처럼 텐트 주변에 천막을 세운다. 버려진 텐트에서 뜯어낸 폴대를 연결해서 뼈대를 만든 뒤 비닐을 덮어 씌우는 방식이다. 전체에 비닐을 덮는 데 4만 5000원이 쓰이고, 은박 단열재는 6만원 어치가 필요하다. 박진형(가명·50대) 씨는 “1개를 짓는 데 15만원쯤 들고 사흘이 걸리는데, 지어 놓으면 훨씬 낫다. 비닐을 두르느냐 안 두르느냐의 차이가 크다”고 말했다. 흙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막기 위해 박씨는 침낭을 목재 파레트 위에 올렸다. 파레트는 공사장에서 건설노동자들에게 음료수를 돌리고 얻어 왔다고 한다.

용산 텐트촌 거주자는 주민에 따르면 약 25명이다. 텐트를 치게 된 사연은 제각각이다. 이모(62)씨의 경우 16년간 회사 생활을 하다 나선 사업에 실패한 게 시작이었다. 용산역에 있다가 무심코 공원에 내려왔는데 텐트촌이 있었다. 3만 5000원짜리 족발과 소주 5병을 사서 텐트촌 주민들에게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했고 그날로 텐트를 쳤다. 최서인 기자

용산 텐트촌 거주자는 주민에 따르면 약 25명이다. 텐트를 치게 된 사연은 제각각이다. 이모(62)씨의 경우 16년간 회사 생활을 하다 나선 사업에 실패한 게 시작이었다. 용산역에 있다가 무심코 공원에 내려왔는데 텐트촌이 있었다. 3만 5000원짜리 족발과 소주 5병을 사서 텐트촌 주민들에게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했고 그날로 텐트를 쳤다. 최서인 기자

추위를 피하기 위해 마련한 세간은 겨울철 화재의 요인이 되기도 한다. 스티로폼 단열재와 비닐, 합성 섬유로 지어진 집은 모기향 불, 담뱃불에도 쉽게 타 버린다. 김씨의 첫번째 텐트는 3년 전 김씨가 집을 비운 사이 전소했다. 외출했다 왔더니 천막이며 짐도 모두 타 버리고 재만 남아있었다고 한다. 김씨의 이웃인 이재신씨는 “여기가 다 비닐이라 담배꽁초 같은 게 있으면 불이 그냥 붙는다”며 “겨울엔 낙엽도 많다 보니 계속 낙엽을 치워야 한다”며 연신 빗자루질을 했다. 버너에 음식을 올려두곤 잊어버리거나, 담뱃불이 옮겨붙는 등의 이유로 텐트촌엔 크고 작은 화재 사고가 잇따른다. 최근에는 위쪽 고가에서 행인이 던진 담배꽁초가 떨어져 텐트에 옮겨 붙는 일도 있었다. 용산소방서는 몇 년 전 집집마다 소화기를 보급했다.

30일 오호, 멀리서 바라본 서울 용산역과 텐트촌 모습. 텐트촌 옆으로 새로 세우고 있는 공중보행교 다리가 보인다. 최서인 기자

30일 오호, 멀리서 바라본 서울 용산역과 텐트촌 모습. 텐트촌 옆으로 새로 세우고 있는 공중보행교 다리가 보인다. 최서인 기자

한파가 길어지면 배급받아 온 도시락도 얼고, 텐트 안 생수병도 얼어 버린다. 페트병 배를 갈라 얼음을 깨 끓여 먹거나, 내년 봄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마셔야 한다. 1997년 외환위기 때 실직한 후 서울역, 광화문 등을 떠돌거나, 사업 실패 등을 이유로 다른 지역에서 오랜 노숙 생활을 거친 이곳 주민들에게는 익숙한 일이다. 텐트촌 생활 12년차 이씨는 “우리는 희망이 없고 미래도 없다. 어디서 밥 안 빌어 먹으려고 일하는 것뿐”이라며 “다른 텐트촌 이웃들이 그랬듯 이렇게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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