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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문소영의 문화가 암시하는 사회

이건희컬렉션 ‘우려내기’를 우려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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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국립현대미술관의 과욕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국립현대미술관(이하 국현) 과천관에서 내년 2월 26일까지 열리는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모네와 피카소, 파리의 아름다운 순간들’은 멋들어진 전시 디자인을 선보인다. 공간 자체로 강렬한 원형전시실의 벽을 세련된 어두운 빛깔로 바꾸고, 7점의 그림(국가 기증 이건희컬렉션 중 해외 거장 회화는 총 7점이다)을 벽을 따라 빙 돌아가며 띄엄띄엄 걸었다. 그림이 7점밖에 안 되다 보니 공간 여백이 많을 수밖에 없는데, 중간중간 휘장을 드리워서 휑하지 않게 하면서 휘장 사이 그림이 마치 성전(聖殿)에 안치된 것처럼 보이게 해 아우라를 극대화했다.

고(故) 이건희 회장이 국현에 기증한 근현대미술 1488점 중에 외국 미술은 총 119점인데, 7점의 그림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파블로 피카소의 도자기 작품이다. 그중 90점이 전시에 나왔는데, 원형 전시대에 세심하게 진열돼 뒤로 보이는 곡선의 벽에 걸린 그림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전시장 한가운데에는 관람객이 앉아 도록을 볼 수 있는 테이블들이 있다. 테이블마다 놓인 램프가 운치 있는 빛을 낸다. 그 둘레에는 옛 파리의 가스 점화 가로등처럼 생긴 조명까지 서 있다. 국현은 “가로등이 켜진 파리의 노천카페에 앉아 창 안의 작품을 감상하는 느낌을 자아내도록 의도했다”고 설명한다.

전례 없는 미술관 흥행에 고무돼
‘모네와 피카소’전 같은 무리수 낳아
참된 기증 효과 위해 연구 집중해야
‘이건희 기증관’ 건립도 재고 필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각각 진행 중인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모네와 피카소, 파리의 아름다운 순간들’ 전시.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각각 진행 중인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모네와 피카소, 파리의 아름다운 순간들’ 전시.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국현 의도대로 노천카페에서 그림을 보는 느낌까지는 모르겠으나, 예술작품으로 장식된 럭셔리 호텔 로비를 거니는 느낌은 확실히 든다. 문제는 여기가 호텔이나 옛 파리 거리를 재현한 테마파크가 아니라 미술관, 그것도 국립미술관이라는 것이다.

20세기부터 미술관들은 흰 벽으로 둘러싸인 밋밋한 공간에 작품을 전시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왔는데, 여기엔 이유가 있다. 지난달 별세한 아일랜드 평론가 브라이언 오도허티의 말처럼 관람자가 작품 하나하나를 오롯이 그 자체로 볼 수 있도록 배경을 중립적으로 만들고 방해 요소를 모두 제거한 것이다. 오도허티는 이러한 현대미술 전시공간을 ‘화이트 큐브(white cube)’라고 명명했다.

물론 화이트 큐브가 도그마가 되는 것에 반발하며 오히려 작품이 공간의 특성과 적극 상호작용하도록 한 전시도 많이 나왔다. 하지만 전시 디자인과 공간이 작품을 압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여전히 미술관들의 불문율이다.

국현의 첫 이건희컬렉션 전시였던 ‘한국미술명작’은 화이트 큐브 전시장의 원칙을 지켰고, 나혜석·김환기·유영국·박수근·이중섭 같은 한국미술사 스타의 많은 작품이 자체 아우라를 뿜어냈다. 그런데 국현의 세번째 이건희컬렉션 전시인 ‘모네와 피카소’는 전시 디자인이 작품을 압도하는 주객전도의 상황이다. 국현은 왜 이렇게 전시를 만들었을까. 작품 수도 적고 작품의 힘도 상대적으로 약한 외국 미술 컬렉션만 가지고 굳이 별도의 전시를 만들자니 이렇게 전시 디자인에 영혼을 갈아 넣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국가 기증 이건희컬렉션은 한국 미술과 역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유물과 작품을 포함한 보고(寶庫)지만, 그중 119점의 해외 미술은 사실상 양념 정도에 불과하다. 컬렉션 중 7점의 그림을 그린 모네·르누아르·피사로·고갱·달리·미로·샤갈은 모두 서양미술사에 이름을 남긴 거장들이지만, 모네의 ‘수련’을 제외하고는 대표작이라 하기 어렵다. 전성기가 아닌 초기작이나 말기작이 많다. 한 거장의 작품이라도 어느 시기 작품인가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또한 컬렉션의 대다수를 이루는 피카소 도자 작품은 에디션이 많아서 해외 경매에 수천만 원 정도에 나와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희귀하지 않은, 해외 주요 미술관에서는 한 코너 정도만 차지할 작품들을, 한국의 대표적인 국립미술관에서 중심 전시장을 할애해 멋들어진 전시 디자인으로 선보이는 모습은 웃프다고밖에 할 수 없다.

게다가 전시 디자이너 외에도 ‘모네와 피카소’ 전을 그럴듯하게 만들기 위해 영혼을 갈아 넣었을 사람은 또 있다. 바로 학예연구사, 즉 큐레이터다. 이 8명의 미술가들 중 다수는 서로 교류가 있었고 영감을 주고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전시장에 나온 작품들은 서로 직접 관련이 없다. 사조도 주제도 스타일도 제각각이라 하나의 테마로 묶기가 어렵고, 각 모던아트 사조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맥락 없는 컬렉션 전시로 내놓는 것은 국립미술관의 격에 맞지 않는 일이다. 그래서 국현은 이 8명의 미술가들을 ‘벨 에포크 시대 (19세기 말~20세기 초 유럽의 경제 문화 융성 시기) 파리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는 공통점으로 엮어 그럭저럭 말이 되는 내러티브를 만들었다. 그걸 만드느라 큐레이터가 기울인 노고가 눈에 선하다.

국현이 이건희컬렉션을 바탕으로 한 일련의 전시계획을 발표했을 때 기자는 어떻게 겨우 7점 그림과 도예 100여 점을 가지고 해외미술전을 따로 만들 수 있냐고 질문했었다. 윤범모 관장은 가능하다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는데, 그 장담은 실현되었다. 큐레이터와 전시 디자이너의 엄청난 공력을 갈아 넣어서. 지금 서울관에서 진행 중인 ‘이중섭’전을 포함해 국현은 이건희컬렉션 특별전을 3개씩이나 하며 미술관 인력의 재능과 노동을 집중시켰고, 그 밖의 기획전에서는 인상적인 성과를 내지 못했다. 심지어 지난 9월 아시아 최대 미술 축제인 키아프 × 프리즈 서울 아트페어가 열려서 해외 미술전문가들이 대거 방한했을 때, 국현 서울관은 그들에게 한국의 동시대 미술가들을 소개할 전시를 선보이는 대신 이중섭전에 주력했다.

‘모던 데자인: 생활, 산업, 외교하는 미술로’ 전시.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모던 데자인: 생활, 산업, 외교하는 미술로’ 전시.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물론 미술관 입장에서는 이건희컬렉션의 흥행 효과에 끌릴 수밖에 없다. 올해 6월에 끝난 ‘한국미술명작’ 전은 코로나19로 관람객 수를 극도로 제한했음에도 불구하고 10개월 남짓 동안 25만 명의 관람객을 모았다. 몇 시간씩 줄을 선 사람들이 거대한 미술관을 빙 둘러싸는 놀라운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지금 이건희컬렉션이 투어 중인 부산시립미술관, 경남도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등에서도 뜨거운 열기가 이어지고 있다. 미술이 이토록 관심의 대상이 된 적이 그 전에도 있었던가.

하지만 국현 같은 대표 국립미술관이라면 모처럼의 흥행의 달콤한 맛에 빠져서 이건희컬렉션을 우려낼 대로 우려내듯이 여러 개의 전시를 만드는 것보다 이건희컬렉션의 다른 선한 영향력에 더 집중해야 한다. 그 중 하나는 미술작품 및 관련 자료 기증의 활성화와 기증 작품에 대한 관심 증가인데, 다행히도 국현 과천관에서 그와 관련된 좋은 전시를 하나 시작했다. ‘모던 데자인: 생활, 산업, 외교하는 미술로’라는 이름의 전시로서, 한국 산업미술의 선구자인 한홍택(1916-1994)과 이완석(1915-1969)의 기증 작품을 바탕으로 1950-60년대 한국 디자인의 여명기를 통섭적으로 돌아보는 전시다.

국현이 주력해야 할 전시는 이런 종류의 기획전들이다. 흥행 효과 극대화를 위해 이건희컬렉션을 쪼개어 여러 전시로 우려내는 게 아니라. 이건희컬렉션 중 외국미술 컬렉션은 이렇게 서둘러 별도 전시를 하면서 빈약한 내용을 멋들어진 디자인으로 메꿀 게 아니다. 유럽의 인상주의와 모던아트 거장들이 한국 근현대미술가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에 초점을 맞춰 한국 근현대미술과 함께 깊이 있는 기획으로 전시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증된 컬렉션에 대한 차분한 연구가 필요하다.

지난해 칼럼 ‘이건희 컬렉션에 대한 세 가지 오해’에서 말했듯이 이건희컬렉션은 세계적인 흥행성보다는 학술적 가치가 큰 컬렉션, 한국미술과 역사 연구에 있어서 귀중한 컬렉션이다. 국립미술관은 ‘이건희컬렉션’이라는 브랜드의 단기적인 흥행 효과에 휘둘리지 말고 연구에 우선 집중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이건희컬렉션의 향후 거취도 명확해질 필요가 있다.

지난 정부에서는 이미 국현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 이건희컬렉션을 다시 한데 모아 서울 송현동 부지(국현 근처)에 ‘이건희 기증관’을 세우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건희컬렉션은 본래 국립박물관·미술관 소장품의 미술사적 공백을 메워주는 차원으로 기증된 것이기 때문에 국박과 국현의 기존 소장품과 어울려 있을 때 더욱 빛이 난다. 따로 떼어 모아놓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완결성이 없어 보일 수 있다. 이건희컬렉션을 원래 기증된 대로 국박과 국현에 놓아두되 대규모 기증을 수용할 새 수장고를 짓고, 기존의 주요 전시실이나 새 수장고 건물에 이 회장 이름을 붙여 뜻을 기리는 방법도 있다. 새 정부가 고려해 관련 정책을 세울만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