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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수의 호크아이] 하늘을 제압하는 자가 경기를 제압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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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인의 정교한 킥은 포르투갈전에 나설 벤투호의 무기다. 뉴스1

이강인의 정교한 킥은 포르투갈전에 나설 벤투호의 무기다. 뉴스1

 2022 카타르월드컵에선 전방부터 강한 압박을 펼치는 건 물론이고, 수비 라인까지 높게 끌어올리는 팀이 많다. 공격권을 내준 후엔 눈 깜짝할 새 수비 태세로 돌아선다. '언더독(이길 가능성이 작은 약자)' 사우디와 일본도 선제골을 내주고도 물러서지 않고 적극적인 플레이를 한 끝에 각각 아르헨티나와 독일을 상대로 역전승을 거뒀다.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한 팀은 후방에 내려앉아서 일명 '10백 수비(공격수 1명을 제외하고 전원 수비)'를 했던 과거와는 크게 달라졌다.

이젠 그라운드엔 빈 곳이 없다. 상대 수비가 올라서는 경우가 많으니, 중원은 막혔다. 이 경우엔 측면이 돌파구가 돼야 하는데, 상대도 예측하고 있다. 길목이란 길목은 전부 막아선다. 킬리안 음바페(프랑스)처럼 제집처럼 측면을 헤집는 선수도 이번 대회에선 상대 수비의 집중 견제에 고전하고 있다. 공간이 거의 없다 보니 슈팅도 쉽지 않다. 종전보다 중거리 슈팅 빈도와 중거리 골이 눈에 띄게 줄었다. 수십 년에 걸쳐 진화하고 또 진화한 축구 전술이 최종 단계에 이른 것일까.

그래도 틈은 있다. 아직 지상 즉 그라운드는 밀집지역이지만, 하늘은 아직 '프리(Free)'이기 때문이다. 크로스나 세트피스처럼 공을 공중에 띄운 공격 루트가 효율적이라는 뜻이다. 이 방식을 이용하면 패스하는 선수 한 명과 공격수 한 명만으로도 눈 깜짝할 새에 골을 만들어낼 수 있다. 신체조건이 더 좋은 상대라도 못 막는다. 게다가 경기 흐름도 순식간에 바꿀 수 있다. 실제로 세트피스, 크로스를 이용한 골이 조별리그에서 자주 나왔다. 한국-가나전에서 터진 조규성의 헤딩골도 두 차례 크로스를 성공한 사례다.

'공중을 제압하는 자가 경기를 제압한다'라는 표현이 맞다. 브루누 페르난데스(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이끄는 한국의 마지막 상대 포르투갈은 앞선 어떤 팀보다 더 중원이 빡빡할 것이다. 탄탄한 조직력까지 갖춰서 한국이 빌드업(후방부터 패스로 경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어려울 수 있다. 드리블 돌파도 좋지만, 하늘을 이용한 빠르고도 묵직한 공격 패턴은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 활용해 볼 만한 전술이다.

가나전에서 크로스를 받아 멀티골을 터뜨린 조규성. 연합뉴스

가나전에서 크로스를 받아 멀티골을 터뜨린 조규성. 연합뉴스

물론 크로스로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선 '정밀한 킥력'을 보유해야 한다. 대부분 크로스는 10m 이상의 먼 거리에서 시도하는데, 정교하지 않으면 상대가 가로챌 확률이 높다. 한국엔 이강인이 있다. 이강인 정도의 기술이라면, 예상보다 빠른 타이밍의 얼리 크로스도 자주 노려 볼 만하다. 가나전 조규성의 어시스트 장면은 이강인의 킥 정확도와 기술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역습 상황에서도 한 번에 빠른 패스를 찔러줄 수도 있다. 상대가 전열을 정비하기 전 약점을 파고들어야 득점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백업 멤버인 이강인은 1차전보다 2차전에서 더 이른 시간에 투입됐는데, 파울루 벤투 감독이 활용 가치가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포르투갈전에선 어떤 플레이를 보여줄지 기대된다.

파울루 벤투(오른쪽) 감독은 가나전에서 이강인의 투입 시점을 이전보다 앞당겼다. 연합뉴스

파울루 벤투(오른쪽) 감독은 가나전에서 이강인의 투입 시점을 이전보다 앞당겼다. 연합뉴스

이강인을 보면 2002 한·일월드컵 막내 시절이 떠오른다. 거스 히딩크 감독도 나를 경기 흐름 전환용 카드로 기용했었다. 이강인이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에서 홀로 생존 경쟁을 모습을 보며 안쓰럽기도 했다. 스페인 리그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곳에선 정말 살아남기 쉽지 않다. 나는 첫 월드컵에서 '뭔가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은 버렸다.

대신 '형들을 돕겠다'는 생각만 했다. 그래야 부담과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강인도 그랬으면 좋겠다. 잘하려고 하기보다는 평소 하던 대로 편안하게 손흥민 등 형들을 지원하는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워낙 담력이 좋고, 실력이 뛰어난 선수라서 골보다는 어시스트, 어시스트보다는 좋은 패스를 시도한다면 '카타르의 기적'도 이뤄지지 않을까.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2002 한·일월드컵 4강 주역이자, 2006 독일월드컵 토고전 프리킥 골의 주인공인 이천수가 2022 카타르월드컵 주요 인물 및 경기 분석을 중앙일보에 연재한다. '호크아이(Hawk-Eye)'는 스포츠에서 사용되는 전자 판독 시스템의 이름이다. 축구 지도자 자격증 중 가장 급수가 높은 P급 자격증 취득을 앞둔 이천수는 매의 눈으로 경기를 분석해 독자에게 알기 쉽게 풀어드린다. 촌철살인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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