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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매뉴얼 8316개 "땜질하듯 추가"…美 재난 매뉴얼 달랐다 [안전 국가, 길을 찾다]

중앙일보

입력

경기 부천시 도당동 DB하이텍(주)부천공장에서 2022 재난대응 안전한국훈련이 진행되고 있다. 뉴스1

경기 부천시 도당동 DB하이텍(주)부천공장에서 2022 재난대응 안전한국훈련이 진행되고 있다. 뉴스1

“한국 재난 관리 체계는 무소불비무소불과(無所不備無所不寡)의 대표적 사례입니다.”

이상대 코리아재난안전연구소 박사가 한국의 재난 안전 시스템을 비유한 말이다. 손자병법 제6편 ‘허실(虛實)’에 등장하는 무소불비부소불과는 ‘부족한 곳이 없도록 하려고 하면 부족하지 않은 곳이 없다’는 뜻이다. 즉, 한정된 인원·자원 때문에 모든 곳을 다 막으려고 하면 결국 모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는 결과가 나온다는 의미다.

재난 대응 체계, 선진국과 비교해보니

다운 오코널 미국 보건복지부 차관보가 FEMA 본부에서 허리케인 대비를 위한 연방정부의 대응책을 발표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다운 오코널 미국 보건복지부 차관보가 FEMA 본부에서 허리케인 대비를 위한 연방정부의 대응책을 발표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이런 지적이 나온 건 한국의 재난·위기 관련 매뉴얼이 선진국보다 지나치게 많아서다. 1일 행정안전부 등에 따르면 한국 정부 재난분야 위기 관련 표준 매뉴얼은 자연재난(13개)과 사회재난(28개), 그리고 범정부 대응이 필요한 주요상황(16개) 등 41개다.

또 주관·유관기관이 재난대응에 필요한 조치사항·절차를 규정한 위기대응 실무매뉴얼은 357개, 재난현장 임무 수행기관의 행동절차를 수록한 현장조치 행동매뉴얼은 8316개가 있다.

이를 두고 지나치게 많다는 지적이다. 강호권 한국ESG융합원장은 “예컨대 적조(赤潮)나 문화재 도난 등은 그 자체로 심각한 ‘재난’일 수 있지만, 범국가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는지 고민해볼 문제”라며 “대형 사건·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땜질하듯 매뉴얼을 추가하다 보니 발생한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미국은 연방재난관리청(FEMA)을 중심으로 재난에 대비할 수 있는 상황을 15개로 규정한다. 핵폭발이나 지진, 탄저균 확산 등 국민 생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굵직한 상황 중심으로 선정했다.

“독일처럼 시나리오별 대응 방안 수립해야”

국내 압사 사고 일지. 그래픽 박경민 기자

국내 압사 사고 일지. 그래픽 박경민 기자

매뉴얼보다 중요한 건 재난 상황에 실제로 대처하는 방식이다. 물론 한국도 유사한 매뉴얼은 차고 넘친다. 중요한 건 “누가, 언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는 것이 이상대 박사의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시나리오별 훈련 여부’도 한국과 선진국 차이점으로 꼽는다. 2012년 독일 하노버 유독가스 유출 사고가 대표적 사례다. 당시 미국 식품기업 크라프트의 한 직원이 하노버 인근 공장에서 근무하다 실수로 고농축 수산화나트륨 용액 탱크에 질산을 부었다.

순식간에 대형 화재가 발생했지만 24시간 이내에 수습이 끝났다. 불이 나자마자 화학사고 전문가 100명을 포함한 방재 인력 1000여명이 방독면·진압장비를 착용하고 즉각 화재 진압에 나선 덕분이다. 사망자도 없었다.

하노버 소방당국과 자치단체는 이미 해당 공장이 어떤 물질을 사용하는지 파악하고 이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화재 진압에 필요한 장비를 갖췄다. 또 진입로·대피로를 오가며 화재를 진압하는 훈련을 수차례 진행했다.

지자체 벤치마킹 필요한 日 긴급구조대응계획

대전광역시 유성구 한국과학기술원(KAIST) 기계공학동에서 안전한국훈련 일환으로 열린 연구실 화재 사고 대응훈련에서 소방 구급대가 부상자를 이송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전광역시 유성구 한국과학기술원(KAIST) 기계공학동에서 안전한국훈련 일환으로 열린 연구실 화재 사고 대응훈련에서 소방 구급대가 부상자를 이송하고 있다. 연합뉴스

일본처럼 업무연속성계획을 수립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업무연속성계획은 재난 발생 시 자치단체가 핵심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만든 계획이다. 일본의 ‘긴급구조대응계획’은 대형 재난이 발생해도 전기·지하철(1주일)과 하수도·고속철도(1개월)가 제 기능을 할 수게 계획을 짜놨다.

강호권 박사는 “위기관리 제도가 지나치게 세분화·다양화돼 있으면 오히려 매뉴얼에 함몰돼 신속 대응을 못 할 수 있다”며 “평소 꾸준한 훈련과 맞춤형 긴급 대응 계획에 따라 시스템을 제대로 운용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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