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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진중권 칼럼

피에타가 된 대통령 부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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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진중권 광운대 교수

진중권 광운대 교수

얼마 전 민주당의 장경태 의원이 대통령 부인의 캄보디아 자선병원 방문 사진이 조명까지 동원해 촬영한 연출사진이라고 주장했다. 대통령실에서 사실이 아니라고 하자 아예 캄보디아에 사람까지 보내 확인하겠다더니 분위기가 여의치 않자 일단 발뺌하는 태세다.

한편 국민의힘에서는 ‘포르노’라는 표현에 발끈했다. 장 의원이 성적 뉘앙스를 풍기는 언사를 사용해 대통령 부인을 모욕했다는 얘기다. 국민의힘 쪽에서는 ‘빈곤 포르노’라는 개념이 사회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확립된 어법이라는 사실을 아예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빈곤 포르노’란 대충 ‘모금에 필요한 동정심을 자아내려고 시각적 센세이셔널리즘에 의존하는 행태’를 가리킨다. 이를 위해서 가령 모델이 된 아이들에게 일부러 누더기를 입히거나, 그들이 마시는 물의 색깔을 흐려 흙탕물로 보이게 만드는 등 다양한 방법이 사용된다.

홍보 앞세우며 회화적 표현 의존
사진의 ‘과도한 미학성’ 논란 불러
혐오정치 담긴 ‘빈곤 포르노’ 주장
사진의 목적·특성 대해 고민해야

대통령 부인의 캄보디아 사진은 딱히 ‘빈곤 포르노’의 정의에 들어맞지 않는다. 동정심을 자아내려고 병든 아이가 되도록 비참해 보이게 연출했다고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나라 대통령 부인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찍었을 법한 그런 유형의 사진에 속한다.

장경태 의원이 쓸데없는 짓을 한 셈인데, 그 배경에는 이젠 민주당 인사와 그 지지자들의 체질로 굳어진 혐오정치의 전술이 있다. 결국 대중들 사이에 대통령 부인에 대한 혐오의 감정을 확산시키고 싶어 어디서 주워들은 풍월로 사안에 엉뚱한 딱지를 갖다 붙인 것이다.

사실 이 논란의 원인은 목적에 어울리지 않는 과도한 미학성에 있다. 실제로 문제의 이미지는 대통령 부인의 동정을 담은 보도사진이라기보다는 잡지에 실리는 연예인의 화보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조명을 설치해 인위적으로 연출한 사진이라는 오해가 생긴 것이다.

초창기 사진은 회화적이었다. 회화는 예술, 사진은 기술. 그 열등의식에서 사진이 회화를 모방하려 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초기 사진가들은 대부분 전직 화가. 그러니 사진을 찍을 때에도 자신들이 아는 유일한 미학, 즉 회화의 미학을 적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진술이 대중화하면서 사진도 자신이 회화가 아니라는 자의식을 갖게 된다. 사진은 회화와 다르다. 회화가 허구라면 사진은 사실이다. 회화의 목적이 아름다움에 있다면 사진의 목적은 진실에 있다. 사진은 그림과 달리 사실의 기록, 사건의 증거다.

그러니 전문작가가 연출해 찍은 완벽한 사진보다는 일반인이 찍은, 종종 구도가 안 맞고(bad crop) 초점이 나간 사진이 외려 사진으로선 더 진정한 것이다. 사진에서 연출을 터부시하는 관행은 이 20세기 전통에서 비롯된다. ‘연출된 것은 현실이 아니라 허구다.’

그런데 최근 회화적 사진이 다시 돌아왔다. 이는 사진의 디지털화(化)와 관련이 있을 게다. 과거에 사진은 ‘그때 그곳에 피사체가 있었다’는 현장존재 증명으로 통했지만, 디지털 시대에는 사진 속 피사체가 정말로 그때 거기에 있었음을 보장하지 못한다.

CG 속에서 사진과 회화는 종합에 도달한다. 회화는 상상을 그릴 수 있으나 생생하지 못하다. 사진은 생생하나 상상을 찍을 수는 없다. CG는 상상을 사진적 생생함으로 제시할 수 있다. 이런 시각문화 속에서 사진과 회화가 서로 결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를 들어 뤽 들라예와 사이먼 노포크 같은 작가는 전쟁의 일상을 담는 데에 널리 알려진 고전회화의 포맷을 참조했다. 다큐멘터리 사진이 위기에 처하자(‘라이프’지가 문을 닫은 지 이미 50년이다), 종군작가들마저 회화적 사진을 통해 살길을 찾고 있는 것이다.

문제가 된 병원 사진 속의 대통령 부인은 피에타상을 연상시킨다. 다른 한편으론 오드리 헵번의 유니세프 사진을 닮기도 했다. 대중이 알아차릴 정도이니 작가가 촬영을 할 때, 혹은 내보낼 사진을 고를 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것들을 레퍼런스로 삼았을 게다.

영부인을 수행하는 촬영자는 사진기자가 아니라 사진작가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둘은 영상의 문법이 사뭇 다르다. 작가의 경우 포스트프로덕션 과정에서 가공을 하게 된다. 그러니 사진이 회화처럼 보이는 것이다. 문제는 그로써 현실이 허구화한다는 데에 있다.

문제의 사진은 보도사진이 아니라 홍보사진에 속한다. 촬영자는 그 문법에 충실했을 뿐이다. 그에게 사진 속 영웅은 아이가 아니라 의뢰자인 대통령 부인일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정작 중심이 되어야 할 병든 아이가 주변으로 밀려났다는 느낌을 주게 된다.

“역대 대통령 부인 중 이렇게 미모가 아름다운 분이 있었냐.” 윤상현 의원의 말은 그 사진이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났음을 증명한다. 중요한 것은 대통령 부인의 인물이 아니라 대통령 부인의 역할이다. 인물을 영웅화하는 사진이 아예 의제를 삼켜버린 것이다.

문제의 사진은 미학적 비평의 대상이지 정치적 공방의 소재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통령 부인의 활동을 담은 사진이 갖추거나 피해야 할 특성에 관한 진지한 논의이지, 대중들 사이에 거친 혐오의 감정을 부추기는 언사가 아니다.

광운대 교수